예토전생[穢土?生] - 5 : 진은숙

노승주 객원 기자 승인 2019.02.14 22:41 | 최종 수정 2019.02.15 09:58 의견 0
 작곡가 진은숙 ⓒPriska Ketterer

빛의 산란과 같은 음향, 히스테릭하게 튀기는 음고의 집합, 그리고 그 기저에서 음악을 세게 붙들고 가는 집요한 힘. 진은숙의 음악이 전문가 집단과 일반 청중의 호응을 동시에 얻고 있는 것은 그의 음악이 그 두 집단의 문화적 감수성을 씨줄과 날줄의 대위법으로 단단히 엮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사용한 '전문가 집단'이라는 용어가 작곡가들의 국제적 네트워크, 혹은 음악학자들의 지역적 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겠다. 미리 밝혀두자면 여기서 말하는 전문가 집단이란 제도권 내의 관현악단들과 제도권 밖의 연주단체들을 아우르는 무대 생태계를 일컫는다.

작곡가(창작)-연주자(실현, realization)-청중(감상)의 안정적 삼각구도로부터 선순환 구조가 도출되어 나오는 모습이 클래식 생태계의 이상적 모형이라면 이 모형에서 연주자의 역할이 극도로 커진 둔각 삼각형의 형태가 현 클래식 음악계의 현실적 모상이다.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감상 측면에서 보면, 과거의 검증된 음악을 발굴 보존하는 것을 미학적 지향으로 삼는 클래식의 특성상 어느 정도 대중과 유리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낡았지만 안전한 자극보다는 새롭고 짜릿한 자극으로 경도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 영역이 취약해진 것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다. 클래식이라는 장르 내에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음악가가 최초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신격화된 작곡가들의 거대한 후광, 그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절대적 권위의 클리셰들이다. 물론 모든 예술가는 창작활동의 초기에 자신의 문화적 습속과 토양으로부터 비롯된 모방의 시기를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클래식 작곡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그 모방기는 대체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거대한 바다처럼 휘몰아쳐 온다. 그 바다를 건너는 데 성공하는 이들은 극소수뿐,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바다를 건너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앞에 놓여있는 것은 대중의 차가운 무관심이라는 사막이다. 이러니 도저히 이 장르에서 좋은 작곡가와 좋은 작품들이 많이 생산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전통과 문화의 보존자 대우를 받으며 제도적 지원 속에서 성장해온 일련의 연주자 집단이 클래식 생태계에서 압도적 지위를 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클래식 보급을 위해 전략적으로 이루어져 온 생활음악화 운동 덕에 연주자 자체의 수가 많아진 것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확고부동하게 한다. 그렇기에 대가들의 바다와 대중의 사막을 모두 건너는 데에 성공한 극소수의 클래식 작곡가들은 연주자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거나 그들 스스로 훌륭한 연주자인 경우가 대다수다. 후자가 마그누스 린드베리나 베르트랑과 같은 작곡가들이라면 전자를 대표하는 작곡가는 다름 아닌 진은숙 일 것이다.

 

10년 넘게 현대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며 신작들을 수없이 접했지만, 진은숙만큼 독특하고 강렬하게 처음부터 우리를 사로잡아버린 작곡가는 없었다. 박자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마법을 부리는 엄청난 거인을 떠올렸다.

- 장기엔 케라스

진은숙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음악해석에서 전문적 식견이 없는 이라 할지라도 그 치밀한 구성력과 조직력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향적 압도감으로 다가오는 그 밀집성은 그녀가 음악을 작곡하는 직접적 매개수단인 악보에서 곧바로 기인하는 것이다. 그녀는 작곡과정에서 절대 컴퓨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손과 종이로만 작업한다. 심지어 자신이 쓴 곡을 피아노로 쳐보지도 않는다. 그녀 자신이 전자음악의 작곡방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작곡가임에도 이런 작업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음과 리듬의 배치에 치밀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디지털 모니터를 보고 정보를 이해하는 것과 종이 위의 형상들을 보고 정보를 이해하는 것 사이에 사고양상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최근의 수많은 뇌과학 연구 결과로 밝혀지고 있다.)

진은숙 친필악보의 영인본을 보면 손으로 그린 것임에도 컴퓨터로 사보 한 것 이상의 정교함과 미적 균형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악보의 형상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진은숙 음악의 특징을 지면상에서 보여주는 시각 예술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점은 분명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로 느낄것이다. 진은숙의 악보를 처음 받아보고 그 명료성과 규모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는 피아니스트 플로랑 보파르의 증언은 틀림없이 그녀의 작품을 연주하는 연주자 일반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의 반영이리라. 

연주자가 최초의 압도감을 넘어 음악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를 맞이하는 것은 악보의 형상에서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음악의 성격, 즉 기계적 농밀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개별 음보다는 음향의 구성이 더욱 중요한 요소로 이용되는 게 그녀 음악의 특징이지만 그를 위해 배치된 음들은 모두 철저한 소리의 논리를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선택되어있다. 이점이 연주자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안정감을 제공한다. 

언제나 연주자에게 그 악기의 활용 가능성의 극한을 요구하는 그 기술적 어려움 속에서 연주자는 자신의 도전과제를 하나하나 완수할 때마다 황홀한 음향적 계층이 부분부분 직조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 그 음향 계층의 연속과 합일로 구성된 전체 음악은 그 '박자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마법을 부리는 엄청난 거인'의 힘으로 통제되어있다. 결국, 작곡가는 연주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직 나를 믿고 네 한계를 돌파해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결과물을 보장할 테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음악적 정수 essence다. 밀도가 떨어지든 말든 곡을 전개하면서 무의미한 나열을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듣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무엇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니, 그렇다면 음악을 뭐 하러 듣는가? 다른 오락과 유희의 수단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데.

- 음악평론가 김나희와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연주자들의 국제적 생태계로부터 강력히 지지받는 '동양인'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악에서 어떤 지역적 정체성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음악적 무국적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외려 그것은 보편적 차원의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그녀의 음악적 성향으로부터 비롯된 '초국적성'이다. 

국제적 무대에서 활동하는 동양출신 작곡가들은 자신의 지역적 정체성을 음악에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현상의 이면에는 클래식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깔려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클래식은 확고부동하게 국제음악화되었다. 이제 한국인 연주자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일본인 연주자가 유럽의 가장 전위적인 앙상블에서 주축을 담당하는 일들은 일상에 속한다. 그렇기에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소유권을 그 누구도 공공연히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모두가 이 장르의 존재기반에 조금씩의 지분을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클래식은 분명 유럽의 전통음악이다. 제아무리 국제화되었다 한들 발원지로서 그들이 가진 수백 년간의 레퍼토리와 제도적 장치들을 유럽 밖 국가의 음악가들이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클래식 생태계를 바라보는 동양권 국가들의 시선에는 유럽권 국가들을 본국, 동양과 같은 유럽 밖 국가들은 그 문화가 이식된 국가로 보는 관념이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클래식을 감상하는 문화에는 서구 우월주의의 향취가 강하게 깔렸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클래식을 배격하거나 그것을 단순히 외국문화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오류임이 틀림없다. 현대에 분명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국제음악으로서의 성질과 유럽음악으로서의 성질을 반반씩 가지고 있으며 둘 중 어느 것도 반대편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지형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현대에 이 균형상태를 부정한 채 둘 중 한쪽만이 참이라고 하는 모든 주장은 분명 정치적인 것일 터이다.

그러나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많이 달랐다. 동양의 작곡가들은 서양음악가들에게 있어 신비로운 동양적 미감을 품고 있는 이들(오리엔탈리즘), 혹은 서양음악의 우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존재들(서구우월주의)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출신의 클래식 작곡가들은 고군분투해야 했다. 한국에는 일찍이 윤이상이 있었다. 1917년에 태어나 민속 음악과 궁중음악이 여전히 세속에서 향유되던 유년기를 보낸 그는 서양 아방가르드의 기법 및 악기와 동양적 철학을 결합한 음악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역시 서양악기와 동양정신의 결합으로 현대 일본에서 가장 위대한 현대음악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1955년생 작곡가 토시오 호소카와는 그의 수제자다.

그러나 진은숙이 독일로 건너온 80년대에, 그와같은 동도서기론은 이미 한국 작곡가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노선이었다. 우선, 한국 민속 음악을 들으면서 유년기를 보냈던 윤이상과 달리 진은숙 세대에 한국 음악은 이미 그 전승이 실전될 위기에 처할 정도로 민중과 국가로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반면, 이웃 나라 일본은 유럽권 국가들로부터 수백년간 오리엔탈리즘적 환상을 투영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문화적 자산을 철저히 계승 보존시켜오고 있었기에 자국의 작곡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넘쳐났다. 결국, 취약한 문화적 뿌리를 가졌던 당대의 한국작곡가들로서는 일본작곡가들이 선점한 지역성 활용 전략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음악적 정수 essence다.' 결국, 진은숙은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자신의 지역적 정체성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을 차단한 채 클래식의 국제적 보편성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었다. '음악의 수준으로는 경쟁할 자신이 있었다.'는 그녀의 말은 단지 음악의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열망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음악이 기거하는 보편성의 세계 역시 함의한다. 

그 보편성이란? 틀림없이 그녀 음악의 기반이 되는 아방가르드적 복잡성과 당대를 휩쓸던 포스트모던감각주의의 결합일게다. 그녀가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해 성공적으로 그것을 해나가는 데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이전 글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던 헝가리의 작곡가 리게티다. 진은숙은 서울대에서 강석희 교수와의 공부를 마치고 곧장 독일의 리게티 문하로 들어간다. 리게티를 선택한 이유는 현대음악계의 현학적 분위기 속에서 오직 그만이 '음악적으로 의미 있는 흐름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 리게티 클래스에서 그녀는 그동안 배웠던 낡은 아방가르드의 기법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음악을 찾아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수년간 단 한 곡도 쓰지 못하는 슬럼프를 겪었다 한다.그러나 그것을 극복한 끝에 지금의 진은숙이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진은숙의 이같은 고뇌의 과정은 스승인 리게티의 인생이 그녀의 방식으로 반복된 것일지도 모른다. 

리게티는 1923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헝가리에서 헝가리인으로 보내며 헝가리의 민족작곡가인 벨라 바르톡을 극복하기 위한 분투로 청년 시절을 보냈다. 50년대 이후 유럽 아방가르드 진영으로 넘어오며 그는 아방가르드의 이념에 대한 신뢰에 입각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그럼에도 아방가르드 주류의 현학적 움직임과는 거리를 둔 채 감각과 느낌을 중시하는 작품들을 쓰며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이 시기 그가 만든 아트모스페르(1961), 론타노(1967)등의 일련의 작품들은 음악적 관심의 대상을 음고의 집합에서 음향으로 옮겨버린 혁신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진영의 파벌싸움과 권위주의화에 염증을 느낀 그는 70년대 이후 돌연 원시적, 민속적 경향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함부르크대학에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만나게 된 것이 바로 진은숙이다. 그들의 첫 만남이 낡은 아방가르드의 기법으로 작곡을 하고 있는 젊은 제자와 개혁과 혁신을 추구하는 노쇠한 스승의 만남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재미있다. 

리게티가 진은숙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파괴하고 그녀로 하여금 다른 길을 가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아방가르드 진영 안에 있으면서도 감각성이라는 것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방면에서 이성이 가장 중요하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아방가르드의 독선적 흐름에서 감각은 후진적 과거의 산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그 이성적 독단이 무너진 후 빈 공간을 메꾼 것은 또다시 감각일 수밖에. 아방가르드 이전의 것이 아방가르드 이후에 재등장하는, 론타노(Lontano, 어떤 먼 것)의 재림. 그리고 그 둘을 잇는 터널은 아방가르드 속에서 감각성을 지켜낸 리게티였다. 진은숙이 포스트모던의 흐름을 일찍 타고 간 데에는 분명 리게티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음악사적 상황과 그녀 개인의 범접 불가능한 음악적 역량이 결합하여 진은숙이라는 작곡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녀가 현대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대체 불가능한 위상은 동시대 다른 한국작곡가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되지 않으므로 그녀의 존재는 하나의 단절처럼 느껴진다. 그 단절감은 그녀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과 지역성을 단절한 채 철저한 보편성으로 나아간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의 기반이 나를 제약한다면 그것을 끊어내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야 하는 법, 그렇게 그녀는 날아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을 것이다. 지역적 기반을 잘라낸 작곡가로서 빈틈없는 합리성으로 자신을 보편과 동화시켜야 했을 그녀의 긴장감과 고독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신의 후배작곡가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고도 음악계로 진출할 수 있게끔 도우려 했다. 그 노력은 자신의 선대를 계보학적으로 구성하고 후배들을 돕는 제도적 장치를 설계하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2012년 오를레앙 피아노 콩쿠르 측에서 진은숙상을 제정하고 싶다고 제의를 보내왔고 진은숙은 외려 자신이 격년으로 2,000유로를 후원할 테니 윤이상상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하는 데에 윤이상 - 강석희 - 진은숙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제안 이유였다. 윤이상에서 진은숙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분명 사제관계로 이루어진 계보이고,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한국 현대음악가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계보다. 그러나 윤이상과 진은숙의 음악적 지향이 완전히 정반대이고 그 둘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토양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 계보는 <포레> - <라벨, 드뷔시> - <메시앙> 등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음악계의 계보나 <베토벤> - <슈만, 멘델스존> - <브람스>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계의 계보와는 다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윤이상과 진은숙을 연속적으로 떠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그것은 분명 진은숙이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계보일 것이다.

2006년부터 정명훈의 초청으로 서울시립 교향악단 상임 작곡가를 맡으며 그녀는 자신이 직접 선정한 현대음악 작품을 연주하는 아르스 노바, 그리고 후배 작곡가들을 키우는 마스터 클래스를 운영했다. 한국의 청중에게 좋은 작품을 소개하고 클래식 관객들을 현대음악 관객이 되도록 유도함으로써 현대음악이 향유되고 소비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아르스 노바였다면 마스터클래스는 한국 출신의 작곡가들이 유학과정 없이도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노력이었다. 실제 마스터 클래스에서 교육을 받은 김택수, 최재혁, 신동훈, 이성현 등의 작곡가들이 국내외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이에 관련해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께서는 음악학자 이희경이 쓴 '현대음악의 즐거움 -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10년의 기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예술가로서 그녀가 가진 독보적 가치, 그녀가 한국 현대음악계에 이바지한 노력과 성과들을 생각해볼 때 그녀의 프로젝트가 서울시향의 정치적 논란 때문에 중단된 현재 상황은 심히 안타깝다. 공동체 주의적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의 특성상 어떤 사안이나 현상에 대한 비판은 쉽게 그 사안과 관련된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형성된 기형적 담론구조 속에서 진은숙이 만들고자 했던 어떤 합리적 구조는 충돌을 일으켰고 그 충돌은 곧바로 정치화되었다. 서울시향과 관련된 사태를 소개하는 데에 지면을 많이 할애할 수 없는 점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 문제와 관련된 진은숙의 입장문 2편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곡가 진은숙 ⓒNew York Philharmonic

그녀가 세계 음악계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와는 별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녀라는 예술가는 절대 잃어선 안 될 하나의 가치다. 그녀가 그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한국인으로서의 지역성을 탈피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음은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다. 필자는 한국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이제 진은숙 없이 광야로 나서야 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진은숙의 존재가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다시 한 번 생각되기를 희망한다. 클래식은 국제성과 유럽성을 동시에 가진 음악이라고 앞서 밝혔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우리나라에는(일본도 마찬가지지만) 단단한 클래식 애호가 계층이 형성되어있다. 그들이 연주자들의 세계를 넘어 작곡가들의 세계에도 관심을 주는 것은 클래식 밖의 시민이 진은숙과 서울시향에 관심을 주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관심을 바탕으로, 진은숙 그리고 그 후대의 한국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조금이라도 더 설 자리를 얻었으면 좋겠다. 정말이다.

저작권자 ⓒ 클래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