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토전생[穢土?生] - 2 : 에릭 에센발드

노승주 객원 기자 승인 2018.12.29 17:21 | 최종 수정 2018.12.29 17:36 의견 0
Eriks Esenvalds

모든 작곡가는 자신의 기악적 배경을 가지기 마련이다. 적어도 클래식에서는, 음악이란 자고로 작곡가의 악기에서 만들어지고 연주자의 악기에서 해석되는 것이라는 미학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작곡계의 가장 큰 변화 중 한 가지를 꼽으라 하면 이런 작곡가들의 기악적 배경이 피아노에서 다른 악기 군으로 점차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비올리스트 출신 작곡가 브렛 딘이나 오보이스트 출신 작곡가 하인츠 홀리거가 그 대표적 예시라 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작곡가 에릭 에센발드 역시 그에 못지않은 독특한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작곡가인데 이는 그 음악의 여러 특성들을 잘 설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배경이란 바로 합창단 가수로서의 그의 경력이다.

현대 합창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에릭 에센발드는 1977년 라트비아의 프리에큘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언급대로 '노래에 완전히 미친 나라'인 라트비아 출신임을 방증하듯 그의 음악에서는 합창단 경력에서 비롯된 유려한 합창 음악적 기교와 전개법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온음계적 클러스터의 화성적 배경위에서 등장하는 솔로 성부들의 성악적 세련됨은 그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그가 음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러한 성악 기술적 측면을 가히 북유럽적이라 할 수 있는 특유의 웅대한 판타지와 조화롭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8에서 16 성부에 이르는 다층적 전개방식은 그의 음악을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압도적 입체감의 비결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러한 음악적 양식을 철저히 조성적인 토대 위에서 자신만의 화성적 색깔을 가지고 전개함으로써 대중성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 그가 머지않아 신비주의적 음악의 중요한 축으로 떠오르리라는 전망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다.

그에게서 21세기 음악의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단순히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은 작곡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한 명의 전인적 음악가로서 클래식의 두터운 성벽 안에 머물지 않고 음악계 전체를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클래식을 자신의 고향이나 집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음악가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그는 스크랴빈도 드뷔시도 아닌 '휘트니 휴스턴'을 고른다. 

"그녀의 음악에 흐르는 화음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저를 매우 깊게 끌어당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서 강한 아카데미의 향취가 느껴지는 것은 그가 유럽 음악계의 중요한 작곡가들로부터 오랜 기간 진지하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트비아 음악 아카데미에서 작곡을 전공하며 그는 유럽 전역의 수많은 작곡가로부터 마스터클래스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클라우스 후버, 필립 마누리, 그리고 마이클 피니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는 마이클 피니시를 만났고 그는 저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스승(라트비아 음악 아카데미의 Selga Mince 교수에 이은)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 복잡한 텍스쳐의 악보를 통해서 말입니다."

오로라나 화산과 같은 거대한 자연적 현상은 그의 음악에 영감을 주는 중요한 소재들 중 하나다. 북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역의 민속 및 자연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을 즐긴다는 그는 자주 자신의 음악이 자연세계와 그 빛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말하곤 한다. 이는 그의 음악 전반에서 나타나는 웅대한 신비주의를 만들어내는 재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그의 판타지는 'Northern Lights'등의 곡에서 표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가사다. 합창 음악에서 가사가 중요하다는 사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연하지만, 그의 음악은 가사와 음악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예술적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특히 가사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좋은 텍스트를 고르는 것으로 모든 작곡 작업을 시작한다는 그는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현대와 고전 시가를 뒤적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텍스트에 관한 자신의 관심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제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좋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든 창작의 모티브들을 수집하고 나면 그는 연필과 종이를 들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다성적 흐름을 통제하기에 피아노만큼 좋은 악기가 없어 피아노를 애용한다는 그는, 그러나 성악적 프레이징이나 호흡조절 등은 자신의 신체에 완전히 체화되어있어 즉각적으로 감지 가능하다 말한다. 

그러나 그가 모든 작업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해나가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 위에서 하는 작업은 그에게 있어 스케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략 70퍼센트 정도 스케치가 완성되면 그는 컴퓨터를 켜 작곡프로그램이자 사보프로그램인 Finale을 이용해 나머지 부분들을 완성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은 마치 팝 음악 프로듀서를 연상시킨다. 악보를 펴놓고 오로지 마음속의 소리만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진은숙이나 파스칼 뒤사팽, 시퀀서나 노테이션 프로그램 등 오롯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의존해 작곡한다는 마이클 도허티와 같은 작곡가들의 사이 어딘가에 그의 작업방식은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의 존재가 한층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지난 20세기 이후 그 맥이 완전히 끊어졌다 여겨졌던 지역음악가로서의 클래식 작곡가의 역할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도이치 그라모폰이나 데카 클래식 등의 세계적 음반사에서 발매되는 영광을 누리면서도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의 침례교회에서 음악 감독을 맡는 등 자신이 사는 터전의 지역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여전히 리가 주립 합창단의 합창단원을 하고 있기도 하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소수 스타를 제외하면 클래식 음악을 한다는 말 자체가 하나의 부르주아적 취미처럼 여겨지게 된 작금의 시대에 클래식 음악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음악과 구별되는 클래식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존재의 과정에 연주행위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클래식의 현장 중심성은 클래식 음악이 세계화에 대응되는 로컬의 무기로써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에릭 에센발드와 같이 지역음악가의 역할과 스타 작곡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내는 음악가의 존재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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