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생 핀란드 작곡가 마그누스 린드베리의 음악적 스타일이 변해온 과정은 23년생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를 연상시킨다. 이는 그 변화의 양상이 아니라 변화의 정도 측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50년대 후반에 유럽에 입성한 자신감 넘치는 중년 음악가 리게티는 아트모스페르(1961)등의 마이크로폴리포니 작품을 내놓으며 아방가르드 음악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당시 그가 연 현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추종하는 추종자들이 파리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70~80년대, 오랜 음악적 공백기를 거친 후 그는 돌연 민속적, 원시적 요소에 깊이 천착하며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을 180도 전환한다.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은 대 작곡가로서는 보기 드문 과격한 변화였다.
리게티가 자신의 말년 스타일에 몰두해있던 80년대,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음악원을 갓 졸업한 일군의 젊은 음악가들이 유럽 음악계에 입성했다. 카이야 사리아호, 에사 페카 살로넨, 그리고 마그누스 린드베리가 바로 그들이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기는 했지만 20대 시절의 마그누스 린드베리는 특히 다름슈타트를 위시한 전위음악계의 스타일에 깊이 몰두했다. 시에나의 여름 코스에서 프랑코 도나토니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다름슈타트에선 브라이언 퍼니하우에게 사사를 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에게 첫 국제적 성공을 가져다준 1982년 작품 'Action-Situation-Signification'이 당시 유행하던 디지털 소리 합성법을 적극 이용한 구체음악이었다는 점은 그가 아방가르드 음악계의 흐름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렇게 아방가르드 음악계 안에서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던 그는 90년대에 이르러 돌연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을 전환한다. 계기는 그의 최대 역작으로 평가받던 kraft(1985)의 완성이었다. 그 규모와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 린드베리의 8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 곡 안에서 그는 음악원 시절부터 한결같이 탐구해온 복잡성과 현학성의 미학을 절정까지 끌어올렸다. 이 작품이 린드베리의 초창기 스타일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 이후 그는 수년에 걸친 공백기에 접어든다. 표면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여행 중 얻은 열병을 치료하느라 보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 이 시기가 그가 오래전부터 고민해온 자신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고민은 그의 개인적 고민이라기보단 당대 음악계의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이념적 고민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위선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이 잘 보여주듯, 전후 클래식 음악계는 20세기 초까지의 감성적이고 서사적인 조성 음악에서 벗어나 현학적인 전위음악을 추구했다. 이런 음악계의 흐름이 집약된 곳이 바로 독일의 다름슈타트, 그리고 그곳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였으며 이곳에서 활동한 크세나키스, 피에르 불레즈, 슈톡하우젠 등의 음악가들은 50~60년대의 클래식 음악계를 지배한 가장 중요한 작곡가들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아방가르드의 흐름은 청중과의 즉각적인 괴리를 불러왔다. 총렬주의, 우연성 음악 등의 실험은 아이디어 그 자체로는 흥미로웠을지언정 일반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현대음악은 점차 작곡가들만 듣는 음악이 되어갔고 초기의 혁명적 예술정신은 아카데미의 권위로 대체되었다. 리게티가 60년대에 그 유명한 일련의 마이크로폴리포니 작품들을 만들고 돌연 자신의 스타일을 전환한 것도 이와 같은 현대음악계의 실정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리라. 60년대 후반에 이미 다름슈타트의 쇠락은 기정사실로 되어있었다.
60년대에도 그랬는데 린드베리가 자신의 음악적 경력을 시작한 80년대엔 오죽했겠는가. 작곡가-연주자-청중으로 형성되는 삼각구도는 깨진지 오래였으며 작곡가들은 이미 유산이 되어버린 아방가르드의 기법들을 가지고 드높아진 작곡가의 신화와 청중의 철저한 외면이라는 현실의 갭 사이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린드베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80년대를 상기해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특정한 기법으로 작곡해야 음악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많은 작곡가가 스스로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린드베리,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주목받은 음악가이자 시벨리우스, 그리그, 라우타바라등 일단의 북유럽적 습속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유럽 음악계에 뛰어든 작곡가 마그누스 린드베리가 일찍부터 이와 같은 상황을 타파하는 데에 큰 관심을 뒀으리라는 것은 쉬이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라우타바라는 그의 시벨리우스 음악원 시절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20대 초반부터 능력 있는 음악가들을 모아 현대음악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연주단체 'toimii'를 조직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카이야 사리아호, 주카 페카 사라스테, 에사 페카 살로넨등의 음악가들과 함께 'korvat auki!(ear open society)'라는 이름의 음악인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다. 20대의 린드베리는 아방가르드의 아이코노클라스트, 즉 관습 타파적 젊은 음악가로 주목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현대음악계 자체의 거시적 방향성에 대해 회의를 해왔던 것이다.
90년대 초, 린드베리는 자신의 30대를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했다. 공백기 이후 몇 곡의 작품을 통해 정제된 그 특유의 화성과 관현악법 스타일의 집약체로 평가받는 92년도 작품 Corrente와 이 작품의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 Corrente II가 바로 그것이다. 이 곡을 통하여 린드베리는 자신의 80년대 역작 kraft에서 시도했던 샤콘느식 전개법을 확대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아방가르드적 복잡성에 스트라빈스키를 연상시키는 원시주의를 결합했다. 그리고 음고면에선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오던 무조, 범조성에서 벗어나 그만의 독특한 조성체계를 확립해 처음으로 대중 앞에 그 정체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결국, 그와 같은 모호성을 다시 복원해내는 것이 내가 지속해서 해오고 있는 작업이다. 나는 물론 기능화성 그 자체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끝난 흐름이니까. 그러나 장기적 측면에서 기능화성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종류의 소리로 들리게끔 하는 것이다." (린드베리, 리처드 화이트하우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후 그는 이렇게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자신의 음악적 어법을 십수 년에 걸쳐 보완 발전시켰다. Aura(1994), Arena(1995), Cantigas(1998-1999)등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걸작들로 꼽힌다.
2002년, 그는 또 한 번의 중대한 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번의 계기는 스타일의 완전한 전환이 아닌 어법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현대 클래식 작품 중 하나인 클라리넷 협주곡(2002)의 완성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린드베리식 조성체계의 완성본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권의 토속성이 결합한, 가히 관능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클라리넷의 선율에 그만의 웅대하고 두터운 관현악 음향을 결합하여 클래식이 진정 새로우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작금의 린드베리는 한 명의 거장 음악가이자 세계 음악계의 단단한 기둥이다. 그는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2009년엔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작곡가, 2014년엔 런던 필하모닉의 상임작곡가를 역임했고 이따금 자기 작품의 피아노 분야를 담당하며 전인적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세계 각국의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그의 곡을 연주하고 싶어하며 그의 음악 한 곡만 40회를 넘게 연주한 연주자도 있을 정도다.
그가 음악가로서 이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그의 음악이 현대음악의 새로운 길로서 폭넓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무너졌던 청중과 음악가 사이의 관계를 복원해냈기 때문이다.
'Classic'이라는 낱말의 번역어는 '고전'이다. 고전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생동하는 무언가였으나, 후대에 선별되고 박제된 것이다. 박제가 본디 유한한 생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하나의 기술적 시도이듯, 박제된 음악인 클래식은 인간과 인간이 만든 예술의 비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영원세계의 소리처럼 다가온다. 클래식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문화적 네트워크는 본디 이러한 예술에 대한 취향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며 때문에 클래식 작곡가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토록 음악의 내적 견고함에 목을 매는 것이다. (기법적인 면뿐 아니라 미학적 정당성 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작곡가들이 내적으로 견고한 성벽을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우선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가 멀어졌다. 20세기 초까지 작곡가는 대개 지휘자와 연주자를 겸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직접 연주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역시 작곡가 자신의 손으로 지휘가 이루어졌다. 물론 작곡가와 연주자의 엄격한 분리를 시대 변화에 따른 직업 전문화의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들이 주관적 관념의 세계 속에서 연주자들과 완전히 단절된 채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저 연주자들의 공부가 부족함을 탓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곡가-연주자-청중의 삼각 구도에서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가 멀어지자 자연히 그 둘과 청중 사이의 관계도 멀어졌다. 현대음악이 작금의 시기까지도 음악제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마그누스 린드베리를 위시한 북유럽음악가들은 무너져버린 이 삼각구도를 복원하는 데에 가장 먼저 앞장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벨리우스 음악원 시절부터 피아니스트로서 전문적 훈련을 받은 린드베리는 자기 작품의 초연에 피아니스트로 적극 참여한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피아니스트가 다른 피아니스트를 위해 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린드베리의 음악적 동료이자 역시 북유럽 출신인 에사 페카 살로넨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지휘자인 동시에 끊임없이 높은 수준의 작품을 발표해오고 있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 직접 지휘하며 그의 작품 중 바이올린 협주곡은 2012년 그라베마이어 작곡상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클래식 청중의 수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새로운 작품을 원하는 수요도 분명 상당히 있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새로운 클래식 작품을 원하는 사람도 많고 새로이 쏟아져 나오는 클래식 작품도 상당히 많은데 그 둘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음은 기이한 일이다. 21세기 작곡계에 시대정신이 있다면 이 기이함에 자기만의 대답을 내놓는 것이 아닐까? 작금의 클래식 음악계 상황에 대해 어느 한 쪽에 전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겠으나 이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오로지 작곡가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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