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를 겸하는 작곡가들이 있다. 가령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1925~2016). 그의 지휘는 계산적이고 철저히 악보 중심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지휘 스타일은 때로 인간미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는 아마 음악가로서 그 자신이 가진 총체적 자아에서 기인한것일터다. 즉 총렬주의의 선구자이자 Derive 2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이성적이고 쿨한 음악가로서의 면모가 그의 지휘 스타일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앙상블 앵태르콩탕포랭을(Ensemble Intercontemporain) 창립하고 장기간 지배한 모더니스트에게 이러한 특징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고전과 낭만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그의 이러한 '모던'하고 '쿨한'접근 방식은 무척 독특한 것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언제나 낭만 레파토리 지휘는 취미일 뿐이며 자신의 본업은 작곡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음악사의 맥락 속에서 그를 논할 때에도 그의 작곡가로서의 면모가 더 자주 다루어진다.
사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작곡가가 지휘자를 겸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했다.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나 장 필립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는 궁정음악가, 즉 궁정 앙상블의 지휘자인 동시에 그가 지휘하는 음악들의 작곡가였다. 바흐가 맡았던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라는 직책 역시 당연히 작곡뿐 아니라 연주와 지휘를 모두 겸하는 자리였다. 후기 바로크 혹은 초기 고전까지 작곡가, 연주자, 지휘자라는 직책은 사실 모두 같은 것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음악에 대한 지적 이해와 창조력, 연주 감각, 정치력, 교육능력까지 두루 갖추고 있지 않으면 세상에 자기 작품을 남길 수 없었던 때였다.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이 시대에 대한 기억은 신화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이후로 점차 지휘자와 작곡가가 분화되기 시작하지만 낭만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많은 작곡가들이 지휘자를 겸했다. 멘델스존이 지휘자로서 바흐의 작품들을 재발굴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차이코프스키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방문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을 해대는 통에 그가 무척이나 민망해했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전해 내려 온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지휘와 작곡은 거의 서로를 넘볼 수 없는 거대한 두 개의 분리된 산맥으로 자리잡게 된다. 작금에 이르러 유명한 지휘자가 동시에 유명한 작곡가이거나 유명한 작곡가가 동시에 유명한 지휘자인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딱 한 명만 빼고. 그게 누구냐. 바로 오늘 소개할 인물 에사-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 1958~)이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그를 지휘자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17년간 LA필의 상임지휘자를 맡아왔으며 현재는 런던 필하모니아(Philharmonia Orchestra)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인물로 말이다. 그러나 지휘자로서의 이러한 성공적인 커리어와 별개로 그는 또한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의 2009년작인 바이올린 협주곡은 진은숙, 존 아담스(John Adams, 1947~), 리게티(George Ligeti, 1923~2006) 등이 이전 수상자로 있는 그라베마이어(Grawemeyer) 작곡상을 수상하였으며 전 세계에서 널리 연주되고 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모더니즘 음악 미학에 대한 전면적 거부(안티 모더니즘)과 수십 년간의 지휘자 경력으로 다져진 오케스트라 음향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특징된다.
그는(적어도 외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피에르 불레즈와는 정반대되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둘다 작곡가-지휘자 혹은 지휘자-작곡가이지만 피에르 불레즈가 그의 초기 커리어를 작곡으로 시작했고 유명해진 것도 작곡으로 먼저 유명해졌던데 반해 살로넨은 그의 초기 커리어를 지휘자로 먼저 시작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 역시 17년에 걸친 LA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활동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 한 가지는 불레즈에게 낭만 레파토리 지휘가 취미였던것과 달리 살로넨에게 있어 작곡이 결코 '취미'는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가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작곡에 투자하는 전업 작곡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작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분명 대단히 크다.
사실 그는 대학, 다시 말해 시벨리우스 아카데미(Sibelius Academy)를 다니던 시절까지는 작곡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음악을 시작한 계기도 11살 때의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의 투랑갈릴라 교향곡(Turangalîla-Symphonie)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경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했었지만 그는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며 한사코 거부했었다고 한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메시앙의 그 교향곡을 듣고서 '만일 내가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 되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후 살로넨은 16살 때 시벨리우스 음악원에 입학해 그곳에서 마그누스 린드베리(Magnus Lindberg, 1958~)와 카이야 사리아호(Kaija Saariaho, 1952~)를 만나 친구가 된다.(둘 모두 현재는 현대 클래식 음악의 무척이나 중요한 작곡가들이다. 마그누스 린드베리는 예토 전생 시즌1에서 한차례 다루기도 했었다.) 셋은 즉시 급진적 모더니스트의 정신으로 의기투합한다. 이 들뜬 열기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지 쉬이 상상해볼 수 있다. 야망에 불타는 10대 후반의 예술가들이었던 그들은 서유럽의 주류 음악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자국의 대중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공명심에 불타 있었다. 그것이 마음 깊이 와 닿는지 어떤지, 자연스러운지 어떤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아방가르드 음악은 인류의 지성이 만들어낸 가장 진보된 결실이었으며 이것이 만들어내는 지적인 열망과 흥분은 감각적 결핍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그들이 조직한 현대음악 그룹 Kovat Auki(핀란드어로 '귀를 열어라'라는 뜻이다.)에서 시골 어귀로 현대음악 연주 투어를 떠났었다고 한다. 일종의 문화적 계몽주의자를 자처하며 현대음악을 전파하러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열망과는 달리 연주 때 객석은 텅텅 비어있었다고한다. 유일한 관객이었던 노부인 둘은 다른 연주회와 착각해서 잘못 들어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두 노부인 앞에서 마우리치오 카겔의 곡을 꿋꿋하게 끝까지 연주했다고 한다. 살로넨은 당시의 기억을 반추하며 '그것은 오만함의 발로'였다고 자평했다.
어쨌든 그런 살로넨이 지휘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83년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대타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말러 3번 지휘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사실 이것이 그의 첫 지휘는 아니고 그 이전에도 지휘를 해본 경험이 몇 번 있긴 있었으나 그 경험들은 그로하여금 지휘의 길로 나가도록 이끌 정도는 못됐다. 그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그가 급진적 모더니스트 작곡가로서의 자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지휘는 자잘한 부업 정도로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3년의 그 사건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갑작스럽게 대타 자리를 맡게 된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그 곡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서 지휘를 완벽하게 해낸다. 그는 단번에 유럽 음악계의 스타가 되고 각종 매니지먼트사에서 계약하자는 전화가 쇄도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후일담으로, 사실 그는 이 제의를 거절하려 했었다고 한다. 이유는 밤늦게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는데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결국 며칠 후 다시 마음을 바꿔 지휘자 자리를 수락한다. 그가 지휘자라는 직책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이후 그는 작품 활동이 뚝 끊긴다. 80년대 중반부터 그는 단 한곡도 생산하지 않는다. 왜일까? 바빠서?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작곡을 중단한 것은 그 자신이 직면해있던 어떤 미학적 차원의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커리어 초기, 살로넨은 지휘를 하면서도 자신을 전업 지휘자라기보단 돈을 벌기 위해 직업적으로 지휘를 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의 주요한 정신적 관심사는 여전히 모더니즘 음악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 때 그가 가졌던 공명심도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채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지휘자로서 직업적으로 공부하고 연주해야 하는 레퍼토리와 자신이 정신적 지향점 사이에 존재하는 갭으로 인해 큰 내적 갈등을 겪는다. 살로넨은 어떻게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해보려고 했다. 거진 1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처음 접해보는 무수한 전통 레퍼토리들의 연구에 더해 모더니즘 음악의 초연과 재연을 위한 기획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털어 넣는다. 살로넨은 후에 이 시기를 돌아보며 거의 '형벌과 같은' 스케줄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그것을 소화해내던 시기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자기 내면과 자기가 처한 상황 사이의 그 벌어진 틈을 미봉합상태로 둔 채 완력에만 의지해 무작정 전진해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한 것은 92년 그가 LA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하여 자신의 주거지를 캘리포니아로 옮기면서부터였다. 평생을 중부 혹은 북부 유럽에서만 살았던 그는 이때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특유의 풍요와 자유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말대로 그것이 그 스스로에게 '정신적 여유'를 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미국과 캘리포니아는 모든 게 허용되는 땅이었다. 자신이 굳이 좁은 사상이나 이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자신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내더라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곳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일상적 삶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 그것을 작품 속에 녹여낼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 내가 다루던 레퍼토리들과 나의 예술적 표현 의지가 어떤 지점에서 완전히 융합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활발히 작품을 써내기 시작한다. LA필 시기 그의 대표작은 96년작인 LA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초기작은 현재 그가 만드는 작품들과는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캘리포니아 시기 그의 변화된 미학관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살로넨은 이 작품에서 LA필이 자신에게 주었던 음악적 영향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물론 이 작품을 만들던 당시에 그가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를 의도하고 작업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외려 당면한 것을 당면한다는 즉자적인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가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평하게 된 것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다.
이후로 살로넨은 거의 매년 한곡씩의 작품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그가 가진 지휘자로서의 오랜 경력 덕택에 그는 오케스트라의 메커니즘과 소리를 무척 잘 이해하고 있는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오케스트라 연주의 실질적인 메커니즘과 그것이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그의 작곡에 있어 주된 관심사다. 실제로 2009년 작품인 바이올린 협주곡의 경우 그는 바이올린 솔로 부분을 쓸 때 이 작품의 헌정자이자 초연자인 바이올리니스트 Leila Josefovics와 사실상 공동 작곡을 했다고 한다. 작곡가들이 연주자들에게 연주기술적 측면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일은 있어도 이렇게 작곡 단계에서부터 공동작업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자연히 이 작품은 무척이나 연주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태생적인 뉘앙스에 바탕을 둔 곡으로 완성될 수 있었고 Leila Josefovics는 수년간 이 작품의 연주를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예술을 어떤 권위적인 틀속에 가두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특징은 그가 지휘자로 열심히 활동하던 때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있었다. 그는 특별히 카라얀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과는 별개로 한 명의 지휘자를 그렇게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는 격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의 17년간의 LA필 활동에 대해서 평단은 그가 고답적인 미국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평하곤 했다. 그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The Orchestra는 오케스트라의 운용방식을 사용자들이 직접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끔 해줌으로써 클래식 음악의 향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특성은 작곡가로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2014년 그가 아이패드 프로모션 캠페인에 참여했던 것은 유명하다. 대중 상업광고에 현대음악가를 출연시킨다는 이 실험적 시도는 그러나 살로넨으로 하여금 상업주의라는 부정적 시선을 받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그 캠페인이 자신의 음악을 소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창구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가 광고를 통해 보여준 것들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실제 자기가 작곡을 하는 방식 그대로, 즉 아이패드 유저로서 자신이 그것을 작곡에 활용하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에게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작곡가들로는 메시앙, 리게티, 존 아담스 정도를 들 수 있다. 이 중 리게티와 존 아담스는 그가 무척이나 존경하는 음악가일 뿐 아니라 지휘자로 일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함께 작업을 했던 음악가들이기도 하다. 반면 그는 마그누스 린드베리, 카이야 사리아호와 같은 학교를 나왔고, 친했으며, 같은 북유럽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과 묶어 북유럽적 음악의 흐름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살로넨 자신은 이러한 평가에 별로 수긍하지 않는다. 즉 자신은 그저 자신의 취향에 입각해 작품을 만들고 있을 뿐이고 여타 북유럽 작곡가들과 자신의 공통점은 철저히 지리적인 차원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게 따지면 블랙 메탈과 자기 음악도 그것 만큼이나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딸이 블랙 메탈 밴드를 하고 있긴 하다.
살로넨이라는 작곡가를 통해 우리는 클래식 음악에서 오랫동안 잊혀왔던 가치인 작품의 창작과 향유에 있어서의 건강한 프로세스를 발견하게된다. 즉 자신이 구상한 작품이 '구현'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실제 그 현장에 참여하는 사람이 만든 작품, 자신이 지휘할 작품을 만드는 작곡가, 순전한 감각과 취향의 차원에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지지해주는 팬덤 말이다. 물론 그 자신 성공한 지휘자이기에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작곡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있을것이다. 어쨌든 그라는 인물은 잊혔던 클래식의 황금시대, 신화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살아 숨 쉬는, 향유되는 문화로서의 클래식이 그의 후광 가운데 비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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