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토전생 시즌2를 시작하며 필자는 원래 아프리카 현대음악계의 흐름을 계통적으로 개괄해보고자 했었다. 일단 지금까지 별로 연구되지 않았던 주제라 흥미로울 것 같았고 제3세계(혹은 제3세계였던)의 클래식 음악계라는 엇비슷한 환경인 만큼 우리 음악계를 돌아보는 데에도 유용한 시사점들을 많이 제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결국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선, 필자가 '아프리카의 현대음악가'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이 대륙을 탐사하려 하자 의외로 '현대음악'이라는 것의 명료한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필자를 가로막았다. 이러한 질문이 떠오르게 된 데에는 필자가 동양에서 서구의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던 학생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즉 필자는 한국 클래식 작곡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서의 현대음악,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럽 아방가르드 씬의 계보적 영향을 받은 음악'만을 현대음악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음악을 탐사하면서도 현대음악에 대한 이러한 프레임을 바탕으로 접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자가 현대음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은 우리나라, 혹은 동아시아 문화계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특수하게 형성된, 다시 말해 다분히 지엽적인 차원의 것이다. 서양 열강에 의한 지배를 받은적이 없는 상태에서 서구화, 혹은 개화를 이룬 우리가 서양음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대하는 방식과 서구에 의해 300년 이상 물리적인 지배를 받았고 지리적으로도 서구사회와 무척 가까운 위치에 있는 문화권이 서양음악을 대하는 방식 사이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현대 클래식 음악 작곡'이라는 영역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좀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안을 보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필자는 '현대음악'을 찾겠다는 태도보다는 '예술 음악'혹은 '작가주의 음악', '서구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받은 작가주의 음악'을 찾겠다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탐사자로서 필자의 시야를 좀 더 공정하고 폭넓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시작했으나 탐사는 순탄치 않았다. 우선, 처음 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프리카 대륙에 이러한 기준에 맞는, 다시 말해 서구 예술 음악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의 수가 많지 않았다. 필자는 30명가량의 작곡가를 찾았다. 이는 국제적인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들이 아니라 지역의 로컬 작곡가까지 모두 포함한 수치다. 다른 문화권에 비하면 분명 현저히 작은 숫자라 할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탐사의 과정에서 필자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교회와 성당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성가대 문화가 매우 뿌리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같은 머나먼 동양권에서도 교회음악은 서양음악 전파의 주요 통로가 되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아프리카에선 교회도 많고 교회음악도 풍부하지만 오케스트라와 같은 '본격적인' 서구적 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프리카에서도 학교나 정부 등의 공식적 행사에서는 교향악대를 이용한 서구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게 어떤 관례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한층 더 의아한 점이었다. 어쨌든 주어진 시간이 많지는 않았기에 필자는 이 의문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 확보한 작곡가들의 리스트를 집중적으로 파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들에 대한 공개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필자는 영어를 비롯해 스와힐리어, 줄루어 웹 등을 번역기를 동원해가며 뒤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음악가 네오 무양가(Neo Muyanga)였다. 그러나 그는 예토전생 시리즈를 통해 다루기엔 적절치 않아 보였다. 분명 어떤 작가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듯 하긴 했으나 장르적으로 볼 때 팝 음악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오페라나 칸타타 등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 들어볼 가치가 있는 음악가라 말하겠다.)
또 30명가량의 작곡가들 가운데 대부분이 나이지리아 작곡가였는데 필자는 이를 나이지리아라는 지역에 어떤 서구적 예술 음악 씬이 형성되고 있다는 징표로 이해했다. (여기서 '서구적 예술 음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척이나 적절하다. 그 작곡가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유럽이나 미국의 음대에서 석박사를 한 경력, ISCM 등의 국제 현대음악단체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던 경험 등을 매우 주요하게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데예예 아데산야(Adeyeye Adesanya), 아요 오룰란티(Ayo Orulanti), 아킨 에우바(Akin Euba) 등이 그러한 음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각 작곡가 개인보다는 그 그룹 전체에 대한 산업적 차원의 혹은 사회학적 차원의 분석이 더욱 유효하리라고 봤다. 필자가 본 주요한 특색들 가운데에는 나이지리아의 클래식 작곡가들이 악기 엔지니어링 산업과 무척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 나이지리아 민속 선율을 바탕으로 한 교회 합창곡이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 이들 '아카데믹'음악에 대한 매우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 있었다.
결국 필자는 탐구의 범위를 더욱더 좁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 바로 우간다의 작곡가 유스티니안 타무수자에 대한 르포를 쓰는 것이었다. 우선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필자가 찾을 수 있었던 아프리카의 클래식 작곡가들 가운데 우간다 작곡가는 단 두 명이었으며 그마저도 그중 한 명은 자료를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스티니안 타무수 자는 탐사 연구가 가능한 우간다 출신의 거의 유일한 작곡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곡가를 고른 것은 그가 다른 아프리카 대륙의 클래식 작곡가들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지닌 인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선 아래에서 더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작곡가 역시 자료가 극히 미비했다는 이유로, 또 이 작곡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살펴보는 게 작곡가 자신을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것 같다는 이유에서 이 글은 유스티니안 타무수자라는 작곡가를 토대로 하여 우간다의 음악문화와 클래식 음악문화를 전반을 살펴보는 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간다의 음악에 대해 논할 요량이라면 우선 우간다가 어디 있는 어떤 나라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 세계전도를 펼쳐보자. 사하라 이남의 중부 아프리카 초원지대 오른편을 보면 거대한 물 웅덩이가 하나 보일 것이다. 이 물웅덩이가 바로 빅토리아호다. 남한의 1/3 정도 되는 이 호수의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가장 큰 크기이며 전 세계에서도 3번째로 크다. 우리 종은 아프리카 중남부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 호수는 그러한 우리 종의 초기 서식 지중 한 군데로 꼽힌다.
그리고 이제 시선을 조금 옮겨 호수의 북서쪽을 바라보자. 그곳에 우간다가 있다. 이 나라의 크기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작은 편인데, 왼편에 위치한 콩고 민주공화국의 크기 탓에 한층 더 왜소해 보인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고 해서 나라 자체도 별 볼 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간다로서는 실로 섭섭한 일일 것이다. 우간다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나라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간다의 별명 중 하나는 '아프리카의 진주'다. 이러한 별명을 갖게 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빅토리아호를 끼고 있으며 비옥한 초원지대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덕에 우간다는 오래도록 지역의 맹주로 군림해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4세기에 킨투(Kintu) 일족이 근방을 통일한 이래 이 풍요로운 지역으로 주변의 씨족들의 이민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18세기 중엽에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혔다. 주민들은 스스로를 '간다'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자신들의 나라는 '간다 사람들의 왕국'이라는 뜻의 '부 간다'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부간다'를 이해하는 것은 유스티니안 타무수자라는 작곡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음악을 '우간다의 음악'이 아니라 '부간다의 음악'이라고 소개하곤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부간다'라는 것이 일본의 '야마토 다마시'와 비슷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부간다와 우간다는 완전히 같은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간다 왕국은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공화국 우간다의 내부에 말이다.
사정은 이렇다. '부간다'의 지역적 영향력은 실로 막강한 것이어서 18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국의 침탈이 시작된 이후에도 부간다는 식민지배의 일방적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 식민지 안에서 다른 민족들을 관리하는 중재 계급의 역할을 맡았다. 그들이 이미 체계적인 정치제도를 확립한 상태에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과정은 아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중엽,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가 종국을 맞이해가는 과정에 카바카(Kabaka)라 불리는 부간다의 왕이 부간다의 독립 문제를 놓고 영국과 치열한 알력 다툼을 벌인다. 관건은 독립된 국가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였다. 지역 맹주이던 부간다는 가급적 자신들이 하나의 개별적인 국가로 독립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양하고 복잡한 국제 정치적 맥락에 얽혀 들어 결국 부간다는 주변 왕국들과 함께 '우간다'라는 하나의 연합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부간다의 왕이었던 무테사 2세는 통합 우간다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부간다의 민족의식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는 게 아니었다. 부간다는 통합 우간다 공화국 안에서 오래도록 가장 강한 민족 권력체로 남아있는다. 그러다 92년, 부간다의 네 씨족 대표는 우간다 정부와 협상하여 결국 부간다 왕국을 부활시킨다. 카바카의 후손을 새로이 옹립해서 말이다. 이후 현재까지도 부간다 왕국과 우간다 공화국 간의 정치적 긴장관계는 이 근방의 지역정치에서 항구적인 관심사가 되어오고 있다.
이처럼 강력한 민족적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부간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독립적인 음악문화도 향유해왔다. 유튜브에서 Buganda Traditional Music 등의 검색어로 검색해보면 그들의 전통음악에 관한 자료를 아주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은 반복적이면서도 복잡한 폴리 리듬의 반주, 그리고 그위에 얹어지는 어쩐지 해학적이다 싶을 정도로 소박한 선율이 특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형으로 모여 각자 자신의 무율 타악기나 유율 타악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독창자가 노래를 부르고 주변 사람들이 간단히 코러스를 하는 이 음악은 얼핏 들으면 심지어 일종의 팝처럼 들린다.(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들의 음악이 팝등의 현대 대중문화에 영향을 받은 바는 없다.) 이 음악에 대한 연구 분석은 학문적으로 매우 상세하고 자세하게 이루어져 있다.(이것은 대부분 부간다인들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연주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자가 흔히 저지르게 되는 실수까지 전부 특정한 이름이 붙여져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연습방법도 교본화 되어있다.
유스티니안 타무수자의 유년기 음악 교육은 자신이 자연스럽게 접하고, 배우고, 연주하고, 즐길 수 있었던 이 부간다 토착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이 음악을 전수받는 교육과정은 그들 사회 안에서 오쿠군줄라(Okugunjula)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 오쿠군줄라는 사실 단순한 음악 교육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춤, 연기 등 한 명의 어린이를 부간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사회화하는 전인적 문화 사회교육을 모두 포함한다. 이는 이들의 음악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즉 부간다에게 음악이란 독립된 문화적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와 있는, 그리하여 그것 하나를 빼면 그들의 삶의 모습 전반이 달라지게 되는 어떤 것이다. 부간다 사람들은 캐주얼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야자나무가 열린 마당에서 모여 친목을 다지기 위해 음악을 연주한다. 그 음악의 모든 보컬적 제스처는 그들의 언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독창자가 어떤 가락을 지어 부를 때 주변 코러스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가 얼마나 플로우와 라임을 탁월하게 만들었는지를 표현한다. 이것은 마치 힙합과 같다. 즉 힙합처럼 이것은 그들 언어의 연장이며,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패션이며, 그들 밖의 다른 누군가의 인정을 받을 필요 따위 전혀 없는 그들만의 문화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특징들이 유스티니안 타무수자라는 음악가의 작업들 속에 녹아있다는 증거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음악들, Katonda Yabale나 Ekitundu Ekisooka를 들어보면 기저에 어떤 복잡한 폴리 리듬의 반주가 깔리는 가운데 소박한 선율이 덧붙여지는 형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이 곡들이 부간다의 음악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는 단지 타무수자가 부간다의 음악을 자신이 만든 '서양음악'의 '재료'로 사용한 결과물은 아니다. 외려 그것은 서양악기와 서양악적 편성을 이용해 부간다 음악을 어떤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즉 그는 음악 안에서 부간다 음악의 '요소'를 차용해 곡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서양 앙상블이 부간다의 음악을 '흉내'내도록 (혹은 '미메시스'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곡가 본인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서양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뉘앙스를 따라 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했다. 그 소리를 흉내내기 위해 연주자들이 겪는 고초야 그의 알바가 아니다. 연주자들에게 그러한 작곡가의 요구는 하나의 도전과제가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악기를 여러 방법으로 실험해봄으로써 결국 그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기 악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단다. 실제로 필자는 그의 음악을 연주했던 어떤 호른 주자가 타무수자가 요구하는 소리를 찾기 위해 셰이커를 이용해 악기의 소리를 막는 방식을 시도해봤던 경험을 아주 재밌었던 추억으로 술회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타무수자는 이런 식으로 서양음악의 연주 방식에 익숙한 연주자들에게 자신을 맞추지 않고 외려 자신의 음악이 가진 낯섦을 연주자에게 적극적으로 던진다. 그리고 연주자들이 악보만 가지고선 자신이 의도한 바를 다 눈치챌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연주 때 연주자들과 아주 적극적으로 밀착 소통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부간다 적인' 뉘앙스와 표현법을 적극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어떤 뿌리 깊은 자신감, 당당함을 본다. 그리고 다소 비약 일진 모르겠으나 이러한 자신감과 당당함은 부간다 사람들이 가진 어떤 민족적 자긍심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간다 공동체 안에서 오쿠군줄라를 바탕으로 음악을 향유하고 배워왔던 타무수자가 처음 제도권 음악 교육을 받았던 캄팔라(Kampala)의 마케레레(Makerere) 대학에서, 그가 대면했던 것은 서양음악 위주의 교육과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학 측에 자신은 부간다 민족음악을 계속 연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학교의 양해를 얻어 계속해서 민족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후 영국 등으로 유학을 가며 서양음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에겐 처음부터 서양음악의 언어 안에 자기 민족적 요소들을 녹여내는 것은 관심대상이 아니었던 듯하다. 외려 그는 서양음악이라는 형식 혹은 포장지로 자신의 음악을 감싸는 방식을 통해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음악을 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예토전생]은 클래시안 노승주 기자가 다양한 작곡가들의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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