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토전생[穢土?生] 2-2 : 베른하르트 랑(Bernhard Lang)

노승주 기자 승인 2019.11.25 09:39 | 최종 수정 2019.12.09 12:28 의견 0

현대 클래식 음악이 다른 장르와 크게 구별되는 점 한 가지는 아무래도 여전히 강고한 힘을 발휘하는 현장성일 것이다. 과거엔 음원(LP 혹은 CD)이 연주의 기록으로 여겨졌지만 시대가 변하고 음원 전송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젠 연주가 음원(mp3)의 재현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클래식 장르는 여전히 연주의 미학을 비교적 잘 지켜나가고 있다. 여기엔 클래식이 가진 역사성, 그리고 그 기나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차곡차곡 축적되어온 그 방대한 공연 인프라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 도처 특히 유럽의 그 수많은 콘서트홀, 그곳에 상주하는 오케스트라들, 아카데미 주변을 떠도는 수많은 앙상블들. 이들은 철저히 물리적 실체를 기반으로 하는 존재들이며 지역적인 존재들이다. 때문에 현대 클래식 작곡에 있어 현장성의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며, 또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에 대한 고민의 결과중 하나로 장르적 차원에서는 음악극이, 또 음악내용 차원에서는 무대에서의 음향적 효과에 대한 실천적 탐구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듯 하다. 오늘 소개할 작곡가 베른하르트 랑도 이러한 흐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작곡가라 이야기 할 수 있을것이다.

베른하르트 랑. 그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교수, 즉흥연주가다. 그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하기에 앞서 우선 위의 곡을 들어보자. 우선 무언가 '전형적이지 않다'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현대음악의 스테레오 타입에 입각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클래식 맥락에서 파악되지도 않는, 무언가 약간... 밴드 음악과 유사한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실제로 베른하르트 랑은 70년대에 오랫동안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있다. 물론 그가 이후 클래식 작곡의 길을 걸었고 그의 최초의 음악 경력도 부르크너 음악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배운 것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이때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경험은 현재까지도 그의 음악에 큰 자양분으로 남아있다. 그가 말한 바 아방가르드 미학이 가진 고답성을 탈피하는 하나의 단초로서 말이다. 모든 것이 사전 조정되고 엄격히 계산되는 아방가르드의 미학에 대항하여 그는 즉흥연주로부터 비롯된 아이디어를 음악에 적극적으로 차용한다고한다. 물론 그가 이야기했듯 '즉흥연주를 과신하지는 않'기에 음악 전체를 즉흥연주로 꾸려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그의 이러한 개성은 그와 동세대의 여타 작곡가들이 그렇듯 90년대에 이르러 아방가르드 미학이 쇠락함에 따라 그것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70년대 중후반 동안 재즈 뮤지션으로 활발히 활동한 그는 80년대에 이르러 돌연 전업 클래식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당대 클래식계의 주류에 맞게 아방가르드 미학에 입각한 작품들을 써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얼마안가 개인적인 벽에 부딪힌다. 자신이 하고 있는 창작이 외려 자신의 정신을 억압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슬럼프다. 자신의 존재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만 같은 이 답답한 느낌 속에서 그는 10년간 작곡가로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러 그는 이 슬럼프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를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기 그가 다시 시작한 무대에서의 즉흥연주였다.  그는 생각했을것이다. 그래 이 자유. 이것이 내가 기거하는 예술적 토양이다. 라고.

이후 그는 작품 속에 기존 아방가르드 미학에서 소위 '꺼려지던'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틈입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반복이라는 요소다. 반복. 사실 이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베른하르트 랑의 음악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동시에 그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하다. 이 반복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베른하르트 랑의 음악에 대해 전부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글도 바로 이 반복이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그의 작품들에 대해 다룰 것이다.

우선 이점부터 미리 이야기해두자. 베른하르트 랑 자신이 말했듯이 아도르노 이후의 근대 음악미학에서 반복이라는 요소는 거의 멸시를 받아왔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첫째, 근대 음악계에서 반복은 보통 '예스러운'것으로 여겨졌다. 근대 이전의 고전음악에서 음악적 의미는 반복을 통해 성립되었었다. 조적 중심음이 반복되며 조가 확립되고 프레이즈가 반복되며 음악적 형태가 확립되고... 등등. 결정적으로는 소나타 형식을 보라. 제시부에서 나타난 다양한 주제가 다채로운 방식으로 전개된 뒤(전개부) 다시 돌아와 원조에서 반복되는 것이(재현부)이 형식의 요체다. 이처럼 반복이라고 하는 것은 고전음악의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전통과의 과격한 단절을 목표로 했던 아방가르드 음악은 이 반복이라는 요소를 배격한다. 대표적으로는 총렬주의 음악이 있다. 이 기법으로 작곡된 음악은 그 어떤 프레이즈도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용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 근대 음악계에서 반복은 지극히 '미국적인'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에는 약간 차별적인 시선이 내포되어 있음을 밝혀야겠다. 전통적으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미국은 변방이었다. 그러나 그 변방 성 덕에 유럽에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조류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라스 등이 이끌었던 미니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쉽게 말해 반복을 극단적으로 파고드는 음악이다. 총렬주의 음악이 반복을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것의 정 반대다. 이 기법은 나름의 성공을 거두어 이들 작곡가들은 꽤나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 음악은 그 반대급부로 격렬한 비판자들도 양산했다. 그들은 이 음악들이 어떤 마약과같은 도취효과를 만들어내는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 신비주의에 입각한 몽롱한 느낌만이 있을뿐 예술적 깊이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런 경향의 음악이 지극히 미국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곤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테크노 음악을 생각해보면 이 비판의 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테크노는 유럽적인 음악이지만 받고 있는 혐의는 미니멀리즘과 비슷하다. 즉 같은 패턴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이 음악은 청자들을 비이성적인 도취 상태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도취는 도취당하는 자의 정신을 무디게 만든다. 어떤 이들은 이때문에 테크노를 파시즘적인 음악이라고까지 말한다.

어쨌건 이처럼 반복이라는 요소는 근대 음악미학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엄금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하겠으나 꺼려졌다 라는 표현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으리라. 그런데 베른하르트랑은 90년대에 이르러 반복을 음악에 적극 이용하기 시작한다. 아니 이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음악의 기본 구성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전략은 미니멀리즘과는 분명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어째서? 작품들을 통해 차차 살펴보게 될 것이다. 여기선 우선 미니멀리즘의 반복 전략이 도취의 효과를 이용한 탈 의식화 상태를 지향한다면 베른하르트랑의 반복 전략은 철저한 의식화를 지향한다는 정도로만 말해두자. 

첫번째 예시로 그의 바그너 오페라 리메이크(혹은 리-라이트 write?) 작품인 <ParZeFool>(2017)을 들어볼 수 있겠다. 바그너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가수의 노래는 선적인 형태로 흐르지 않고 특정 프레이즈와 텍스트를 계속해서 반복해 말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한다. 작품속의 텍스트는 베른하르트 랑 자신의 선택을 바탕으로 부분 부분 잘라져 단편적으로 제시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잘라진 파편들의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원전 텍스트의 서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들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 단편들의 선택에 있어 원전이 가진 서사구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원전에선 한번 말해지고 지나갔을 뿐인 부분들이 베른하르트 랑의 작품 속에서는 특별히 선택되어 반복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의 전체적인 서사 형태는 원본의 그것과 무척이나 다르다.

그렇다면 그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90년대까지 그는 열정적으로 바그너의 텍스트를 탐독하는 바그네리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날 텍스트를 거듭 읽어내려가다 그는 그의 작품 안에 그 자신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인간 혐오와 인종차별적 사상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각색을 통해 본래 바그너가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거의 지워버린다. 바그너만큼 그 원전 텍스트에 대해 광적인 팬층이 형성되어있는 클래식 작곡가도 흔치 않은지라 이러한 작업을 하는데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그저 “그건 바그너 입장에선 조금 손해 보는 일이긴 하다.”라고 말할 뿐이다.

또다른 흥미로운 작품은 <DW>시리즈다. <ParZeFool>이 음악극의 형식을 취한다면 <DW>시리즈는 본격적인 콘서트용 기악음악이다. 이 시리즈 안에서 그는 전통 오케스트라, 밴드, 신시사이저, 그리고 루프 머신을 이용한다. ?이 편성 자체도 그렇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전통 오케스트라와 밴드는 정확히 작곡가가 기보한 대로 루프 프레이즈를 ‘연주’한다. 그런데 이 연주된 루프 프레이즈는 루프 머신에 의해 기계적으로 반복 ‘재생’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충돌과 조화의 여러 순간들. 이것들이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베른하르트 랑의 이러한 반복 기법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즉 들뢰즈의 유명한 저서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그 반복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베른하르트 랑이 주목한 것은 반복 그 자체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부분이다. 즉 어떠한 동일한 개체, 혹은 동일한 모티브가 동일한 형태와 양상으로 반복 제시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같은 게 아니다. 인간의 두뇌는 이전에 제시된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이 제시된 것을 해명하려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복은 그 자체로 계속해서 새로운 맥락을 생성해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Monadologie>라는 시리즈가 있다. 사실 앞서 이야기 한 <ParZeFool>역시 이 시리즈의 하나다. 이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봤을때 앞서 이야기한 반복을 통한 재맥락화라는 그의 음악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 속에는 수많은 다른 음악들이 '인용'된다. <ParZeFool>에서 바그너가 인용되었듯 말이다. 재즈,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등... 인용의 대상이 되는 음악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이 인용들은 앞서 그가 <ParZeFool>에서 바그너를 '인용'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원전의 맥락과 의도를 존중하는 인용이 아니다. 외려 여기서 그는 원전에서 어떤 음악적 파편을 잘라낸 후 자신이 마련한 반복적 토대 속으로 그것을 던져 넣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원래 존재했던 음악적 파편이 그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가 과거 도나우싱엔 음악제에 대해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독일 아방가르드의 중심인 도나우싱엔을 그는 하나의 작은 섬으로 표현했다. 그곳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독자적인 미학이 작동하는 곳이다. 그곳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며 설사 그 새로운 시도들이 모조리 실패한다 하더라도 용인하다. 마치 전성기 실리콘 벨리의 풍경 같다. 이것은 어쩌면 혁신을 만들어내기에 있어서 최적의 환경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질문도 던져 볼 수 있다. 음악에서 '새로움', '혁신'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 들어보지 못한 기법은 처음엔 우리에게 놀라움을 준다. 그러한 놀라움을 통해 우리는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건 음악은 IT제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이패드나 맥북은 품질로서 그 혁신이 유효한 것이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지만 음악에서 혁신의 유효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이런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청중은 이른바 '뉴뮤직'이 양산해내고 있는 그 새로움 자체를 이제 지루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에 대해 베른하르트랑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새로이 창작되는 창작물의 90퍼센트 이상은 (작품 자체로서든 작품 내의 구성 성분의 비율로서든) 기존 작품의 인용이자 모방이라는 것이다. 즉, 이미 알려진 재료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떤 맥락으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의 <Monodologie>시리즈도 그렇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복에 대한 그의 사유는 흥미롭게도 음악 기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실 반복이라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음악에서 다시 탐구하고 의식하게되는 일종의 라이트 모티프인지도 모르겠다. 2006년 오스트리아의 빈은 그 해를 빈 모차르트의 해로 선포하고 베른하르트 랑에게 이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을 위촉한다. 그런데 위촉을 받은 베른하르트랑이 만들어 내놓은 음악극의 이름은 다름 아닌 'I hate Mozart'. 이 과감한 제목에는 어떤 반전적 요소도 없다. 극은 음악계에서 모차르트의 작품이 지나치게 많이 연주되는 통에 오페라 가수들이 분통을 터트린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차르트가 콘서트 레퍼토리로 지겹게 '반복'되는 상황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억지스러운 아재개그가 아니라 베른하르트 랑 본인이 밝힌 내용이다.) 작품 내에선 심지어 모차르트의 작품 중 그 무엇도 인용되지 않는다. 여기선 어떤 반골기질마저 느껴진다. 

어떤 작곡가를 개괄할 때마다 그 작곡가에 대해 갖게 되는 종합적인 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진은숙에 대해선 철저한 작곡가라던지, 뒤사팽에 대해선 자기 세계가 단단한 작곡가라던지, 등등등 말이다. 그리고 베른하르트 랑을 살펴보며 필자에게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그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작곡가라는 사실이었다. 현재 그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음대 작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자신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교수가 아닌 창작자로 여기고, 또 외부에도 그렇게 평가되기를 더 원하는 듯하다. 이는 그가 게오르그 프레드리히 하스, 올가 노이버트와 함께 창단한 'Die andere Saite'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작곡가들이 교수직 없이도 지속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에서 작곡가들이 교수직을 얻어 경제적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은 평균적으로 40대 이후이며 그 이전까지 작곡가로서의 삶은 극도로 불안한 토대 위에 서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것 조차 가장 나은 상황인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불안한 여건은 어쩌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음악적 실험'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요인인지 모른다. 물론 'Die andere Saite'가 그러한 본래의 목적을 성취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선, 필자는 눈치껏 답변을 회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진 문제의식에는 퍽 공감하게 된다. 예술에서 자유로운 정신만큼 중요한 것은 또 없을 것이며 그 자유로운 정신은 안정적이고 실제적 토대 위에서만 제대로 발현될 수 있다. 베른하르트 랑은 분명 예술가의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측면에 있어 하나의 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활동은 그 역시 그러한 자유로운 정신이 성장하는데에 있어 위협이 되는 외부적 요소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작은 인간적 틈새를 통해 필자는 그에게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필자 역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킬 의무를 가진 한 명의 창작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는 모든 창작자에게 공통되는 부분 이리라 본다. 필자의 생각에 그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공통분모를 통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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