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토전생[穢土?生] 2-5 : 토마스 아데스(Thomas Ad?s) 1부

노승주 기자 승인 2020.01.20 09:55 | 최종 수정 2020.01.20 16:52 의견 0

첫째, LA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열 콘서트 허바우,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같은 서구권 유수의 주요 교향악단에서 지휘하는 스타 지휘자.
둘째, 로열 오페라 하우스, 런던 오페라 하우스,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등에서 데뷔한 오페라 음악감독.
셋째, 카네기 홀 연주, 뉴욕 및 런던에서의 독주회, 뉴욕 필하모닉과의 협연 경력 등을 가지고 있는 인기 피아니스트.
넷째, 그라베마이어 작곡상, 에른스트 폰 지멘스상 등을 수상한 거물급 현대음악 작곡가. 

▲작곡가 토마스 아데스(Thomas Adès) ©Catherine Ashmore

이것은 서로 다른 네 음악가의 프로필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모두 한 음악가의 이력이다. 보통의 음악가가 저 중 단 하나의 경력만 가지고 있더라도 그는 틀림없이 스타 내지는 거장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왕성한 추진력과 기획력, 그리고 그 비할 데 없는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이 모든 것들을 혼자 해 나가고 있다. 바로 오늘 소개할 1971년생 영국 작곡가 토마스 아데스다.

토마스 아데스, 그는 누구인가? 영국의 음악 비평가인 엔드루 포터는 토마스 아데스의 초창기 앨범에 대한 코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했던 것을 생각 없이 반복하지 않고 신선한 관점으로 현대음악의 주류를 건드리며,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는 나아가 토마스 아데스가 Mozartian 성향의 천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그가 천재임은 분명 하나 모차르트(혹은 그가 대표하고 있는 음악 신동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 같은 완성형의 음악가라기보단 철저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스스로와 스스로의 작품을 혁신해가는 음악가라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자기 혁신과 사그라들지 않는 젊은 정신. 이것은 토마스 아데스라고 하는 음악 창조자를 설명하는 데 있어 무척이나 핵심적인 특징들이다. 현재 그는 명실상부 서구 음악계에서 대가의 위치를 확고히 한 사람임에도 그가 작업하고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은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20대 초반의 열정적인 음악인을 생각나게 한다. 이는 그가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든, 혹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에 작곡가로서 참여하든, 아니면 솔로이스트와 함께 작품을 놓고 협업하든 상관없이 똑같다. 현장에서 일할 때 그는 마치 오래 사귀어온 친구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현장 동료들에게 단단하고 꾸준한 예술적 애정을 쏟는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내 음악을 단지 듣고만 있는 게 싫다." "음악은 나의 주업이기에 나는 항상 일어나서 현장에 뛰어들고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참여지향적인 특성에 더해 그는 무척이나 지적이고 학구적인 음악가이기도 하다. 여기서 학구적이라는 것은 그가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 특히 고전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언어를 구축해 나가는 데에 무척이나 적극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어떤 한 작곡가만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실수이다. 만일 모든 음악가가 자기 고유의 어법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세상엔 그 어떤 음악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음악은 어느 정도 다른 음악을 연상시키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외부의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내가 쓰고자 하는 음악에 맞게 변형시키는 생물학적 과정과도 같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가변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또한 무척 능동적인 것인데, 그것은 내가 받아들인 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결국 나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학구적인 성향과 참여지향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진 음악가는 드물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그 두 작업을 모두 그와 같은 수준에서 성공적으로 해내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그가 이처럼 서로 상당히 달라 보이는 두 영역을 동시에 가져가면서도 그 두 영역 모두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일구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자질 모두가 그에게 있어 무척 편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즉 자연스러운 자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학구적 측면과 참여적 측면 모두에서 힘을 발휘하는 그의 이 각각의 개인적 강점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우리는 그 연원을 그의 이력과 경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은 학구적인 특징이다. 필자는 그것이 그의 독특한 집안 환경에서 온 것이리라 추측한다.

토마스 아데스는 1971년 3월에 런던 북부에서 태어났다. 겉으로 보기엔 무척 평범해 보였던 이 집안엔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양 부모가 모두 인문 혹은 예술 분야의 학자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아버지는 언어학자이자 번역가였으며 어머니는 초현실주의 예술사의 권위자였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자 부모 아래에서 그는 책 읽기와 사색을 즐겨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또한 어려서부터 그의 부모는 그를 완전히 어른처럼 대해주었기에 그는 그의 부모와 곧잘 TS Eliot의 문학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유년시절의 기억에 대해 "무척 운이 좋은 편이었다."라고 짧게 평했다. 아데스는 자신이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을 것이라 추측한다. 추측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정확한 실상에 대해선 아데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학구적인 성향이 그가 나고자란 가정의 환경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의 참여지향적인 음악가로서의 면모는 그가 10대 후반 시절까지 열정적인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일 터다. 실제로 그는 작곡가로서보다 피아노 연주가로서 더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처음 음악계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드러내 보인 것 역시 19살이던 1990년 BBC에서 주최한 '올해의 젊은 음악가'라는 이름의 대회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던 일이다. 이것에 대해 그는 "최종 우승자는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야 했는데 그 곡이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2위를 한 것이 기뻤다."라고 술회했다. 그의 이 이야기는 농담이 아닌 듯 보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자신이 전업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사이에서 무엇이 되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결국 작곡가로서의 길을 열어나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피아노 커리어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93년 Park Lane Group 시리즈의 일환으로 런던에서 첫 공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비록 전어 피아니스트로서는 아니지만 공개 리사이틀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가 음악가로서의 정체성 면에서 한 발쯤은 연주자의 영역에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작곡가로서 그의 참여지향적인 성향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쉬이 추측해볼 수 있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1997년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사이먼 래틀이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위촉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데스는 이것을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중요한 시험으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위촉작 Aslya를 써낸다. 작업에 투입한 그의 에너지가 얼마나 막대한 것이었던지 3악장의 반복 프레이즈를 쓰던 도중에 실신해 입원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완성된 작품은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무엇이든 걸작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러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찬사까지 쏟아졌다. 그를 현재의 자리까지 오게 한 탄탄대로가 열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화려한 데뷔는 반작용도 낳았다. 그 특유의 왕성한 활동과 음악계에서 이루어지는 그에 대한 그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홍보 등이 평자들의 반감을 샀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를 "과대평가된 골든보이" 취급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데에 무엇보다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이었다. 직설적이고 또 약간 거친화법을 가진 그는 과거의 걸작들에 대해 서슴없는 발언들을 하곤 했는데 가령 말러의 교향곡 2번에 대해서 "미치도록 시끄러운 음악"이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이런 그의 어투와 성격으로 인해 그는 오만한 스타라는 이미지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진지한 음악가다. 그에 대한 수많은 논란과, 그에게 씌워진 여러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 하나하나,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음악과 창작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로부터 나온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창작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작품 속에 부여한 예술적 애정과 의지가 청자에게까지 도달하기를 그는 언제나 절실히 소망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강한 애정이 없다면 그 음악은 평평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한 애정, 살아있는 창작 의지의 전달 매개체로서의 예술작품을 만들고, 또 지키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과 발언들이 기성 클래식 음악계와 어느 정도 충돌할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말한다. "많은 클래식 음악 관련 기관들이 옛 자아의 그림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들은 결코 옛날과 같은 문화적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서 공손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

[예토전생]은 클래시안 노승주 기자가 다양한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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