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의 대중문화는 양적 측면에서 비약적이라 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투입되는 그 자본에 크기에 비해 축적된 콘텐츠의 질적 수준은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중국 방송에서 한국 예능의 포맷을 수입하여 각색한 영상을 인터넷을 통해 자주 접했을게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는 우리나라 방송계의 모습이었다. 중국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G2로 불리는 대국으로 성장했을지 몰라도 문화적 측면에선 가야 할 길이 먼 것이다. 사실 판빙빙, 장국영 등 우리가 아는 중국계 글로벌 스타들이 실상 대부분 홍콩이나 대만 출신이기도 하다.
의문이 들게다. 문화의 본질은 축적이 아닌가. 기원전 8000년경의 유적에서 이미 피리 등의 악기가 출토된 바 있을 정도로 인류 문화사에서 가장 앞선 문명중 하나인 중국에서 이 같은 문화적 빈약함이 노출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역사 속에서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근세까지만 해도 서양문명이 중국문명에 대해 가졌던 문화적 열등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계몽 철학의 아버지인 라이프니츠가 중국과 서양문명을 비교한 그의 글을 통해 서양 문명은 정신적 측면에 있어서 중국보다 나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때의 중국과 현재의 중국을 문화적으로 단절시킨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을 터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른바 문혁이라고 줄여 부르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중국 대륙 전체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은 정치적 소란이다. 이 소란의 주모자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던 마오쩌둥. 그가 반포한 16개 조 교시를 바탕으로 전국의 홍위병들이 반 자본주의 구태 청산을 외치며 지식인, 고위직, 상류계층을 무차별적으로 린치 한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서원과 문화재들이 파괴됐다. 파괴된 유 무형의 자산들의 가치 총액은 금전으로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오늘 소개할 작곡가 키강첸(?其?)은 1951년 상하이에서 엘리트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바로 이 극좌 테러리즘을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그는 서예가이자 베이징 예술원 원장이기도 했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예술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가 베이징 예술대학에 입학하자 때맞춰 문혁이 일어났고 그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사상교화라는 명목으로 가족과 함께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다. 한 명의 재능 있는 예술가가 그 재능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꺾일 위기상황이었다.
키강첸의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놀라운 의지력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시기에 그처럼 탄압을 받았던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공산당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생산하는 어용 예술가가 되어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아니면 예술의 길 자체를 포기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키강첸은 아주 일찍부터 자신에게 창조력과 예술적 세계를 지켜나갈 의무가 있음을 깨닫고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시기를 말 그대로 버텨나간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대단히 힘든 일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문혁의 광풍이 사그라들고 군간부나 농민공이 아닌 계급에게도 대학 입학이 다시 허용되면서 키강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서른 살에 가까운 나이에 다시 음대에 입학한 키강첸은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연합 졸업 콩쿠르에 우승함으로써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받아낸다.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유학길이었다.
프랑스에서 키강첸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자 음악교육가인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 ~ 1992)을 만난다. 파리음악원의 전직 교수였던 그는 프랑스 음악계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 피에르 불레즈, 크세나키스, 퀸시 존스 등 그의 제자들은 음악계 전 장르에서 파격과 혁신을 이뤄냈다. 그 자신 역시 당대 가장 진일보한 화성을 구사하는 작곡가중 한 명이기도 했으며 60년대 이후엔 다름슈타트의 경향에 지친 스펙트럴리즘 작곡가들의 사상적 은사 역할도 맡았다.
메시앙의 개인적 위대함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는 키강첸의 상황에 딱 맞는 완벽한 교사였다. 당시의 키강첸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과제는 수백 년간 축적된 자산과 노하우를 가진 서양인들의 음악적 내공을 빨리 따라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시앙은 유럽의 그 어느 음악계보다도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중요시하는 프랑스 음악계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프랑스 음악계가 어떤 곳인지 이해하고 싶다면 메시앙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메시앙이 피아노를 통해 초기 음악교육을 받던 때, 그가 주로 다룬 학습용 레퍼토리는 드뷔시, 라벨 등 자신보다 바로 한세대 앞의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이었다. 이는 우리로 따지면 작곡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이 중학생 고등학생 때부터 진은숙의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음악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찾아온 키강첸의 좋은 귀와 영특한 머리를 알아본 메시앙은 이미 은퇴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그를 제자로 맞아들인다. 메시앙과의 공부를 통해 키강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적 언어를 구축해나간다.
키강첸과 메시앙은 소위 말해서 케미가 잘 맞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고 한다. 메시앙은 머나먼 동양에서 홀몸으로 유학 온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아꼈다. 말 그대로 매달 프랑이 든 돈 봉투를 생활비로 건네면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세미나나 작곡가들의 미팅이 있으면 반드시 키강첸이 참석하게 했다. 세미나 시작시간이 되었는데 그가 도착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시작할 수 없다'라고 하며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극진함 속에서 키강첸은 이른바 프랑스적 화성 기법의 정수를 터득해나간다.
아마 메시앙이 이토록 키강첸을 아꼈던 것은 그가 뛰어난 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사적 측면에서도 자신과 닮은 데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게다. 키강첸이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를 교화소에서 허비하고 모진 고생을 했던 것과 비슷하게 메시앙은 작곡가로서 전성기가 되었어야 마땅한 20대에 2차 세계대전을 맞아 포로생활을 했다.이때 교도소 안에서 작곡해 망가진 악기로 연주했던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다.
인간적인 성향면에서도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유교 전통에서 자라 보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던 키강첸처럼 메시앙은 구교인 가톨릭의 헌신적인 신자였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메시앙은 1936년 '프랑스의 젊은이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당시 파리 음악의 경솔한 풍조를 비판했고 말년에 자신의 제자인 피에르 불레즈 등이 총렬주의의 흐름(실은 자기가 문을 연 것이나 다름없는)으로 강하게 경도되자 그들과 거리를 두며 마지막까지 화성과 선율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쪽에 서는 보수적 음악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키강첸이 서양문화에 경도되어 서양음악을 공부하러 동양에서 온 학생이었고 메시앙은 서양음악의 전통을 자신의 모국어로 가지고 일찍부터 가믈란 음악이나 힌두교 음악 등 동양음악문화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었다는 점 역시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키강첸의 메시앙과의 공부가 마냥 순탄했느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외려 키강첸에게 메시앙과의 수업은 그가 극복해나가야 할 하나의 과제였고 시련이었다. 메시앙은 끊임없이 키강첸에게 자기 자신의 근원을 탐구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프랑스 음악이 좋아서 프랑스에 왔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이것은 우리 것이고, 네 것을 찾아라'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키강첸은 스승의 이러한 조언에 크나큰 혼란을 겪는다.
사실 이것은 키강첸 뿐만이 아니라 유럽으로 유학 간 동양 출신의 작곡학도 대부분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클래식 음악을 공부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국제적 어법으로 취급하지만 실상 그것은 서양인인 그들이 자신들의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해 만들어낸 토착의 문화적 자산인 것이다.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의 문화적 습속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키고 전통을 축적하며 조금씩 작은 일보를 내디뎌온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메시앙이 유달리 그런 부분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기도 했다.작곡가로서 그는 자신이 가진 종교와 자연물에 대한 관심을 곡에 그대로 투영하여 일평생 가톨릭과 새라는 주제에 천착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면모는 선생으로서도 마찬가지여서 크세나키스가 극도로 수학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하게 된 배경에는 건축과 수학에 대한 지식을 음악에 적극 활용해보라는 메시앙의 권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민 끝에 메시앙의 조언대로 자기 뿌리를 더듬어가기 시작한 키강첸은 중국의 전통 연극 음악을 발견한다. 문화 대혁명의 와중에도 중국 문화의 대표 격이었던 연극의 음악 레퍼토리는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되어서 수십여 편에 달하는 음악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키강첸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서정적인 스타일인 자신의 음악에 중국 전통음악의 강한 다이내믹과 원시적 색채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간다.
그의 작업들은 주로 인간성의 찬미와 개인의 개선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탐구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수적이고 고색창연한 미학이다. 한 명의 인간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탐구가 곡 전반에 주제의식으로 흐른다. 이것은 메시앙의 미학관과는 다소 대비되는데 그 대비의 지점이 퍽 흥미롭다. 메시앙이 집착적으로 새를 탐구할 때 그것은 자신의 가톨릭 철학을 바탕으로 한, 즉 인간의 무력함과 그것을 깨달은 자의 초연함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키강첸은 전통적 가치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거기에는 분명 인간성에 대한 어떤 낙관주의가 깔려있다.
이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철학이 근대 이전 중국의 유학 세계관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콘텐츠의 부재로 인해 고전적 소재로 눈을 돌리고 있는 중국의 최근 경향을 생각해보면 이 지점이 키강첸의 중국 내 유명세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예술감독을 맡았던 이력과 함께 말이다. 어찌 됐건,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했다. 음악을 직접 들어보며 그의 삶과 작업을 깊게 이해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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