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꼬네송. 그는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곡가다. 그에 관한 자료를 찾다 보면 영어나 독일어로 된 자료의 수가 극히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단히 의아한 일이다. 꼬네송처럼 이름이 제법 알려진 작곡가가 현대음악의 전통적 강자인 독일이나 국제 클래식 음악계의 주 무대인 영어권에서 그 흔적이 쉬이 포착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활동 대부분이 프랑스 국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으로, 그 탓에 필자는 이번 글을 위해 프랑스 웹의 심연을 열심히 탐사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현대음악계에 극히 드문 내수형(?)의 작곡가라는 사실이었다.
우선 경력을 보자. 그의 상임 작곡가 활동은 리옹 국립 오케스트라, 페이 데 루아흐 국립 오케스트라, 브뤼셀 국립 오케스트라 등 프랑스 혹은 프랑스어권의 국가들에 집중되어있다. 물론 간혹 네덜란드 등에서 상임작곡가를 맡는다던가 그의 음악이 유럽 전체에서 레퍼토리로 다루어진다던가 하는 걸 보면 그가 국제적 수준에 도달한 작곡가임은 분명하나 그가 주로 기거하고 평가받는 음악적 토양은 결코 프랑스 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수준의 비평은 프랑스 밖보다 프랑스 내에서 더욱 활발히 생산된다.
그가 실로 로컬한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을 한 번 더 상기시켜주는 것은 그의 학력이다. 그는 프랑스 음악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파리의 국립음악원이나 시립음악원이 아니라 자신의 출생지인 불로뉴 비앙쿠르의 불로뉴 시립음악원에서 피아노, 음악이론, 음악사, 작곡 등을 전공했다. 비록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후 파리시립음악원에 가서 오케스트라 지휘와 관현악 편곡 등을 공부하긴 했지만, 상술한 것과 같은 그의 초기 이력 탓에 파리 외곽에서 파리 내부로 향하는 그의 이동이 마치 유학과도 같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그의 학력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의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작곡을 주요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고향인 볼로뉴의 시립음악원에서 작곡 수업을 듣긴 했지만, 그것은 피아노, 음악이론 등을 배우는 과정에서 함께 밟은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 주요 전공으로 이수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수학한 파리 시립음악원에서 역시 그는 지휘, 편곡등 실제적인 곡 연주와 관련된 과목들을 공부했다. 이와 같은 그의 학습 과정이 어쩌면 그로 하여금 어떤 아카데믹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하다 보면 단순한 작곡 이론과 기법을 넘어 유럽 작곡계의 계보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작곡가들의 레퍼런스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때문에 그가 작곡이 아닌 연주의 영역에서 음악을 공부함으로써 외려 작곡계의 계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체론적 관점에서 음악을 조망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로컬한 과정과 경력을 거쳐 성장해 마침내는 소위 내수형(?) 작곡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가능한 데에는 프랑스 클래식 음악계의 탄탄한 청중층과 문화적 인프라로부터 비롯된 안정성이 그 배경이 될 터다. 자신들의 전통음악인 클래식, 나아가 명백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프랑스적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경제적 토대가 되어준다는 이야기다.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오랜 음악원의 전통, 드뷔시, 라벨 등의 대 작곡가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및 앙상블 앵태르콩탕포랭등의 존재가 바로 그 문화적 인프라의 한 측면이다.
물론 이처럼 자국 음악계에서 자생적으로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음악가가 프랑스에 꼬네송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르간 즉흥연주의 대가 티에리 에스카이히,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이미 한번 다룬 바 있는 파스칼 뒤사팽 등이 모두 프랑스의 문화적 자산을 바탕으로 '클래식'만 하며 먹고사는 음악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파스칼 뒤사팽은 작곡을 주요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현대음악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으며, 음악계에서도 어느정도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꼬네송과 공통점이 많다. 현대 프랑스 클래식 작곡계에서 어떠한 사조가 형성되고 있다면 그 안에서도 틀림없이 감각주의적 경향의 하나로 묶일 그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비교해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리라. 이제부턴 꼬네송의 작업을 기법적, 미학적 측면에서 들여다 볼텐데 그 과정에서 뒤사팽과의 비교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 감각주의 사조의 윤곽이 눈에 잡히도록 해보겠다.
1.
구체적인 음악 이야기를 해보자. 그의 음악적 성향은 흔히 '실용주의'로 일컬어진다. 물론 여기서의 실용주의가 미디어의 보족물로서 존재하는 실용음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실용주의는 소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연역되어 나오는 기법이나 관념에서 벗어난, 혹은 그것을 지나치게 극대화 하여 외려 음악의 내용을 억압하는 과도한 관념과 사상을 배제하는 성격을 가진 실용주의다. 작곡가 본인의 인터뷰와 평론들을 살펴보면 그가 그러한 무의미한(그에게 있어) 관념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어떠한 실체로 '취향'을 위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음악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는 그가 기거하는 취향 공동체의 속성은 곧 영화 음악적 세련성, 리드믹한 펑크, 근대 프랑스 음악의 색채성 등이다.
뒤사팽도 그와 비슷하게 취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업하는 작곡가다. 그러나 그와 꼬네송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의 음악에서 취향 담론은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꼬네송처럼 곡 안에 삽입된 문화요소로서의 취향이 아니라 곡이 뽑혀 나오는 자신의 내적 실체로서 자기 내부에 용해된 취향이다. 때문에 뒤사팽의 곡은 다른 형식과 악기편성으로 되어있어도 대부분 아주 비슷하게 들린다. 반면 꼬네송의 음악을 들어보면 펑크, 영화음악, 클래식 등 응고된 취향의 덩어리들을 하나의 요소로 자르고 붙이기에 곡 마다의 컨셉과 분위기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2.
꼬네송 음악의 또 다른 큰 특징 중 한가지는 바로 파편성이다. 우선 기법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그의 음악에서 간혹 나타나는 일정한 패턴의 베이스가 끊임없이 강박을 때리며 중심을 잡는 형태는 명백히 테크노와 같은 EDM 장르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얹혀지는 선율은 결코 EDM의 문법을 쫓아가지 않는다. 외려 그것은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 등 20세기 초 민족주의 음악의 선율처럼 들린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Disco-Toccata나 Techno-Parade는 최종적인 음향적 결과물은 마치 20세기 액션영화의 배경음악 같다.
이같은 파편성은 그의 작업 전반의 미학적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모자이크와 같이 복잡한 현대사회의 면면이라 말한다. 모자이크란 본디 저만의 독자적 형상을 가진 각각의 조각이 전체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숨겨져 있던 실제 메시지가 드러나는 예술 장르. 모자이크 예술의 아름다움은 최종적인 조화로운 결과물의 이면에 있는 그 자잘한 복잡성에 있다. 그의 음악은 다양한 문화적 파편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져있으나 그 최종적인 결과물은 분명 어떤 특정한 취향으로 집약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말대로 현대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고 사람들의 사유와 감각 방식도 모자이크처럼 파편화되어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음악이 극도로 복잡하게 구성되어있으면서도 최종적인 결과물은 직관적으로 곧바로 이해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뒤사팽과 꼬네송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벌어지는 부분이다. 뒤사팽 역시 신체성으로부터 비롯된 문화요소의 습득과 그것의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곡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작업방식 면에서 보면 그는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음 한음 밀고 나가면서 작곡하는 선적이고 서사적인 작곡가다. 이런 그의 작업방식의 특징은 그 음악의 외형으로 곧바로 나타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꼬네송이 자기 음악의 내부에 각기 다른 문화로부터 나온 요소들을 구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전체에서 조화가 조망되도록 한다면 뒤사팽은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여러 문화적 요소들을 빨아들이는 기관이 되어 자기 안에서 조화를 이룬 예술적 에너지를 하나하나 서사적으로 뽑아내기에 이같은 차이가 만들어진다. 실제로 꼬네송은 작업과정에서도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작곡하기 보단 각 파편을 작곡해 그것을 결합해 나가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한다.
3.
꼬네송 음악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협화성이다. 사실 이는 꼬네송 음악의 개인적 색채라기보단 일단의 프랑스 작곡가들이 공통되게 공유하는 계보적 색채로 봐야 옳다. 프랑스 작곡가들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들어본 사람이라면 가장 선적인 성향을 가진 작곡가라 할지라도 수직적인 부분에서 특유의 일관된 협화성, 조화를 지니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이 색채의 계보는 대단히 깊은 연원을 가지고있다. 현대 프랑스의 음악원에는 Ecriture라는 과정이 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쓰기' 혹은 '작곡법'으로 번역되는 이것은 20세기까지 동일한 교육목표를 가지고 있음에도 음악원 내에 별개로 존재해왔던 화성법, 대위법 등의 개별적 과정을 하나로 엮은 것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개념으로는 인지되어 왔으되 명확한 하나의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던 무언가에 붙인 명패다. Ecriture의 남다른 점은 작곡 실기보단 클래식 음악을 소리 그 자체로서 연구하고 그 에센스를 뽑아내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끝없이 소리 그 자체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벼르도록 만든다.
이같은 교육 방식을 바탕으로 지난한 음악원의 역사를 거치며 축적되어온 소리를 다루는 기술의 총체가 프랑스 아카데미즘이라 할 만한 하나의 계보를 이루었다. 라벨의 혁신, 드뷔시의 혁신, 메시앙의 혁신은 모두 그 계보의 당대적 아방가르드다. 그리고 필자는 꼬네송과 뒤사팽, 나아가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바 있는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역시 그와 같은 프랑스적 협화성의 계보에 속한 작곡가들로 이해한다. 물론 언급한 세 작곡가 모두 프랑스 음악계의 중심점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온 음악가들이지만 요즘같은 초 연결 시대에 언저리와 중심 사이의 구분이 그렇게 중요할까? 더욱이 어떤 기제를 제 것으로 만들어 놀이하기 위해선 항상 기제로부터 약간의 거리두기가 필요한 법이다, 기제에게 잡아먹히지 않기위해서. 이들의 음악을 청중들이 다른 현대음악에 비해 듣기 편하게 여기는 것 역시 이 협화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조화롭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소리를 찾는 보수적 감상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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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꼬네송과 뒤사팽, 그리고 여타 프랑스 작곡가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가운데 어떠한 큰 흐름이 유령과 같이 너울너울 떠오르는 것을 보게된다. 앞서 서두에서 필자는 그것을 감각주의라 감히 칭해보았다. 이같은 이름은 이 일단의 흐름에 50년대 독일 아방가르드의 음악적 조류, 즉 독일의 음악적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온것이라는 인식에 의해 붙여졌다.
그렇다면 그 독일 구조주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토록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작곡가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독일 구조주의의 예술적 철학은 무엇이었다. 그것은 감상자들의 관심을 음의 배치로 만들어지는 최종적 소리의 향유에서 소리의 배치 방식 그 자체에 대한 심오한 사유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프로젝트는 예술사적인 측면에서는 나름의 힘과 영향력을 가졌으나 대중적인 차원에선 완전히 실패했다. 대중의 음악적 취향은 시대가 지날수록 음향 위주로 더욱 경도되어 갔으며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바람과는 달리 후발주자로서 대중의 비판적 인식이 그들의 개척지로 도달하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수많은 예술가들과 학파들이 50년대에 만들어진 구조주의의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험으로 설계된 미학적, 구조적 체계에 감상을 맞추고자 한 그들의 미학은 그래서 날이 갈수록 청중과의 거리를 벌려갔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와같은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클래식 작곡가들의 감각주의는 보통의 감각주의보다 더한, 가히 쾌락주의에 이르는 것이 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꼬네 송의 초기작품들을 보면 나이트클럽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특성과 그 청자층을 생각해보면 이는 파격적이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필자가 이같은 감각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로 꼽은 뒤사팽과 꼬네송을 비교했을때, 뒤사팽 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꼬네송의 음악이 음향적으로는 뒤사팽 보다도 훨씬 이전 시대의 음악처럼 들린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50년대 독일 아방가르드 음악처럼 들린다는 말이 아니다. 외려 그의 음악은 라벨처럼 들리고, 풀랑처럼 들린다, 파스칼 뒤사팽의 음악이 여전히 아방가르드의 향취를 풍길때 말이다. 1900년대 초의 음악과 2000년대 초의 음악이 1950년대의 음악을 중심축으로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내는 이 유사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중세를 축으로 고대와 르네상스가 마찬가지로 드러내 보였던 유사성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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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이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아카데믹 식자층도, 팝적 감성에 익숙한 대중층도 아닌 정통 클래식 청중층에 어필하는 방식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음악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청자들이다. 어쩌면 현대 클래식의 비극은 작곡가와 청중층 사이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적정한 수준에서 관리되는 자극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리스트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들어보라. 그들은 클래식 내에서도 가장 전투적이고 열정적인 류의 작곡가들이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음향적 소재와 그 결과물은 수백년간 축적되어온 안전한 토대위에 쌓아올려진 것이다. 그 소리들은 언제나 기존의 다른 맥락으로부터 이해되며 그 내부의 열정은 실로 광적이지만 사실 그 누구에게도 경악과 공포의 감정을 안기지 않는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이 초연당시에 크나큰 비난과 아유에 직면했었다는 지적은 일리 있다. 그러나 그 곡이 바로 일주일 뒤에 열린 재연에서는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한번 클래식은 유럽 전통음악으로서의 토속성과 국제적 음악으로서의 보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말한 적이 있다. 꼬네송은 적어도 청중층의 확보 면에선 클래식의 토속성에 완전히 의존한 전략을 택했는데 그것은 클래식을 전통문화로서 보존하고 있는 유럽이기에 사용할 수 있었던 전략이었을게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청중 풀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긴 있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보수적 음악 청자들이 어디 유럽에만 있겠는가. 상술한 바와 같이 클래식은 토속적인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해서 이 머나먼 동아시아에도 상당한 수준의 고정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관심을 현대음악 쪽으로 옮겨 조금이라도 클래식 청중 풀에서 현대음악 청중을 이끌어내 보려는 시도가 아르스 노바라는 이름으로 서울시향에서 이루어졌었다. 여기서 관련 내용을 자세히 다루기는 어려우니 관심이 있는 독자께서는 음악학자 이희경의 '현대음악의 즐거움 - 아르스노바 10년의 기록'을 일독하시길 권한다.
작곡가들에게 참 어려운 시대다. 음악만 잘 만들면 되는게 아니라 내 음악을 들을 청중까지 알아서 마련해야 하니까. 유럽등지에서 대체 불가능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10년간 아르스 노바를 운영하다 하다 서울시향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끝내 사임하게 된 진은숙 작곡가의 경우는 이 문제가 정말 어렵고 무서운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그래서 약간 절망하게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길이 보이면 그리로 가야한다. 작곡가들도 마찬가지다.
<각주>
1. https://www.guillaumeconnesson.net/biographie
2. https://theaderks.wordpress.com/2018/04/11/guillaume-connesson-i-used-a-12tone-row-to-create-an-icy-atmosphere/
3. http://www.tutti-magazine.fr/news/page/Guillaume-Connesson-Pour-sortir-au-jour-Mathieu-Dufour-Brussels-Philharmonic-Stephane-Deneve-fr/
4. https://toutelaculture.com/musique/classique-musique/interview-guillaume-connesson-la-musique-doit-raconter-vous-accompagner-dans-votre-vie-et-vous-nourrir-interieur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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