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토전생[穢土?生] - 7 : 한스 아브라함센

노승주 객원 기자 승인 2019.03.31 09:41 | 최종 수정 2019.03.31 11:35 의견 0

작가 한강은 자신의 소설 <흰>에서 어떤 흰 것들에 대해 썼다. 강보, 배내옷, 각설탕, 입김, 쌀, 파도, 백지, 백발, 수의... 이들은 작품 속에서 '나'와 그 밖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단초이자 그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 '나'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들이다.

흰색은 아직 안에 무엇도 쓰여지거나 그려지지 않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안을 채우고 싶게끔 자극하는 색깔이다. 때문에 흰색은 순수한 색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사실 자연 속에서 흰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대개의 경우 흰색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사물 위에 덧씌워 새로이 부여하는 색깔이다. 때문에 흰색은 복잡다단한 것을 한데 품어 잠재우는, 조용히 위를 덮어 마치 그들이 없었던 것인 양 행세하는 속성을 가진, 약간 무서운 색깔이기도 하다.

 

흰 종이와 같은 백색의 빛. 눈은 단 몇 분 만에 우리의 일상적인 광경들을 변화시키며 모든 익숙한 소음들을 먹어버린다.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다른 것을 생각하게 한다. - 한스 아브라함센, Kate Molleson과의 인터뷰

 

작곡가 한스 아브라함센 ⓒLars Skaaning/Courtesy of the artist

오늘 소개할 한스 아브라함센은 흰 것,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이라는 자연물에 강하게 집착하는 작곡가다. 90년대 초반, 무려 10년이라는 기나긴 슬럼프를 겪은 후 컴백하면서 극도로 심화된 눈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대표작 <Schnee>부터 최근의 걸작<Let me tell you>까지 작품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Let me tell you>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점진으로 소멸한 후, 마치 새하얀 눈 속을 자박자박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베이스 드럼의 특수 주법이 나오는 부분은 대단히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살고있는 그는 항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작업하고, 말을 정교하게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섬세한 사람이어서 눈에 특히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때인가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이란 '불규칙한 존재인 인간이 일말의 규칙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눈발의 미세한 패턴 변화 역시 겉으로 보이는 장엄한 조화를 헤집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 조화속의 변화라는 자연의 정경은 분명 대단히 날카롭고 예리한 감각을 가진 예술가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이리라.

눈이 아브라함센에게 미친 영향은 미학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시적으로는 세밀한 변화, 거시적으로는 정서적 일관성을 가진 음향 덩어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눈을 닮았다. 앞서 그의 대표작중 하나로 언급했던 <Schnee>는 그 제목(독일어로 눈)처럼 눈의 정경을 묘사하는듯한 음형 속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불규칙한 변화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불쑥 솟아 나오는 순박한 색채의 선율 한 가닥. 혹자는 여기서 북유럽 작곡가인 한스 아브라함센의 민속적 유치함을 발견한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실체처럼 얹혀진 그것은 분명 그러한 비아냥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치게 상세한 변호는 사족이 될 터다. 작품을 직접 들어보자. 백문이 불여일청이니까.

 

눈이라는 제제에 대한 애착과는 별개로 규칙적 반복과 불규칙한 변화라는 음악적 형상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작곡 인생의 초창기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다.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그는 10년간의 긴 슬럼프를 전후로 음악적 스타일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작곡가다. (이전에 소개한 작곡가 중에 마그누스 린드버그도 같은 경우였다. 두 작곡가가 모두 북유럽 출신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아브라함센의 초창기 음악적 커리어를 살펴보면, 70년대 다름슈타트를 위시한 독일 음악계에 처음 데뷔한 후 그가 New Simplicity의 흐름에 몸을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단순성으로 번역되는 이 흐름은 극도의 지적 복잡성을 추구한 아방가르드의 음악이 관념적으로는 풍부할지언정 그 실체적 음악 결과물로서는 건조(aridity)하기 그지없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사조였다. 이들은 아방가르드의 관념적 구조주의에서 탈피해 거대서사를 복구하고, 화성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을 지향했다.

그 흐름의 여러 분파 중에서도 미니멀리즘이라는 장르가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본디 일정한 패턴을 확대, 점층, 축소, 변형하는 방식으로 무한 반복하여 몽환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으로, 이는 현대의 테크노 음악이 가진 미학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미니멀리즘은 그 본연의 특성상 음향과 음색에 대한 탐구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즉 다른 무엇보다도 음향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 음악의 중요한 미학적 관심사였던 것이다. 한스 아브라함센 역시 이같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비록 그가 온전한 형태의 미니멀리즘 작품을 제작한적은 없지만 90년대에 이르러 바하의 카논을 미니멀리즘에 가깝게 편곡한 작업물이나 그가 가진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크나큰 애착등을 보면 그가 미니멀리즘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리게티등과 함께 New Simplicity계열의 음악가로 잘나가던 그가 80년대 후반의 피아노 에튀드를 마지막으로 돌연 8년에 걸친 긴 슬럼프을 맞았다. 그 시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나는 더이상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매우 비참하고 슬픈 일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목소리 잃은 가수로 여겼다. 나는 점차 비어있는 흰 종이(오선지)에 공포증을 갖게 되었다. - 한스 아브라함센, Kate Molleson과의 인터뷰

 

2000년, 오랜 공백기를 끝낸 그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컴백한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했던 이 작품에서 그는 특유의 금속성 질감의 오케스트레이션과 내밀하면서도 정교하게 제작된 음악적 세계를 비로소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나는 계속 겨울로 돌아오게 된다."

이같은 그의 음악적 전환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8년에 걸친 그의 공백기에 어떤 단서가 있음은 분명하다.

이 시기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몇몇 흔적을 바탕으로 추측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첫째, 인터뷰에서 밝힌것처처럼 그가 그 공백기 동안 극심한 '빈 종이' 공포증을 겪었다는 사실. 둘째, '자기 내면의 진정한 표현 의지'에 대해 회의했었다는 사실. 셋째, 공백기에서 벗어난 이후 그가 눈이라는 제제에 전보다 훨씬 더 천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등이 우리에게 힌트로 주어져 있다.

정답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필자는 그가 자신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빈 종이와 눈 사이에서 어떤 동질성을 발견해낸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작곡가에게 있어 빈 종이는 자신을 규제하는 감옥인 동시에 모든 음악적 상상이 시작되는 곳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추상적 아이디어가 지면상의 구현 가능성이라는 제약 아래에 무화되어 버리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 음악은 오로지 지면 위에서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빈 종이가 그를 아프게 했지만 그것은 그가 시작한 곳, 그가 의지해야 할 곳, 그가 돌아와야 했던 곳이었다. 한강의 작품 속에서 흰것이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인 동시에 마침내 '나'가 도착한 곳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도 밟지않은 순백의 대지를 조심스럽게 밟는 흑백영화의 장면을 상상해보자. 모든 일상의 장면들을 무화시켜버리는 눈 위에 새로이 자기 흔적을 남기는 행동은 그 자체로 예술 창작의 메타포같다. 한스 아브라함센은 빈 종이에 대한 공포심을 눈에 대한 애정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닐까. 따뜻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현시하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눈을 표현하는 그의 작품들이 어딘가 아픈 느낌을 주는것은 그때문일터다. 한스 아브라함센의 작품 <Winternacht>를 들어보자. 현악기들과 목관악기들의 움직임은 소리없는 비명같다. 귀를 찌르는 금관악기의 점입은 종말을 알리는 사이렌처럼 느껴진다.

 

현재의 그는 유럽을 대표하는 거장으로서 후학 양성과 국제적 협업에 열정을 바치고있다. 2014년 작곡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Left Alone>은  그와 같은 그의 최근 행보 중에서도 상당히 개인적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는 작업물이다. 프랑스의 아카데믹 성향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뇌성마비로 인해 오른손을 거의 쓰지 못하는 작곡가 본인의 신체적 부자유에서 창작의 동기를 얻은 것이다. 실제로 그의 초기 경력을 보면 프렌치 호른으로 처음 음악을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작곡가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이는 '한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시 그의 관현악 작품에서 느껴지는 폐부를 찌르는듯한 소리의 색채는 이같은 기악적 배경에서 유래한 것일까? 어쨌든 어려서부터 라벨이나 코른골트등의 작곡가들이 만든 왼손을 위한 피아노에 강한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는 그는 그와 같은 개인적 어려움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대표곡이자 그를 메가톤급(현대음악계 기준으로) 명성의 주인공으로 올려놓은 작품<Let me tell you>는 바바라 하니간이라는 뛰어난 성악가와의 협업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형태를 얻을 수 있었던 곡이다. 이 곡은 햄릿의 오펠리아 이야기를 소재로 한 폴 그리피스의 동명의 작품을 바탕으로 했는데 발표 즉시 전문가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일제히 찬사를 받았다. 성악가이면서 지휘자를 겸하기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하니 간은 이 작품의 연주에서 단순히 작곡가의 지시사항을 따르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것을 해석하여 작품을 생동감 있게 재창조해 냈는데, 이 작품이 상금 1억원에 달하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의 탁월성과 더불어 이같은 협업의 행운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쫒아가다보면 최근 들어 그가 점차 음악의 서사성, 묘사 성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법도 2000년대의 피아노 협주곡으로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점차 섬세하게 벼려져가고있다. 이러한 부분이 그를 더욱 흥미로운 작곡가로 만든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가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목표를 향해 조금씩 벽돌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목표란 과연 무엇일까? 일단은 올해 완성이 예정되어있는 그의 오페라를 기다려보아야 할것이다. 그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그의 눈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각주>

1. http://www.musicsalesclassical.com/composer/long-bio/hans-abrahamsen

2. https://www.nytimes.com/2016/03/13/arts/music/hans-abrahamsen-fame-and-snow-falling-on-a-composer.html

3. http://katemolleson.com/interview-hans-abrahamsen/

4. http://www.geraeuschen.de/12.html

5. https://www.gramophone.co.uk/classical-music-news/hans-abrahamsen-wins-the-2016-grawemeyer-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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