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토전생[穢土?生] - 5 : 올라 야일로

노승주 객원 기자 승인 2019.02.27 13:32 | 최종 수정 2019.02.27 13:58 의견 1

영화음악에선 철저히 감독과 스튜디오의 요구에 음악을 맞춰야 한다. 그들은 대개 이미 존재하는 다른 스타일을 모방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콘서트 음악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영화 음악적인 스타일로... 

- 올라 야일로 

(Ray Holstein, An Exclusive Interview With Ola Gjeilo, 2015)

Ola Gjeilo ©Jessica-Griffin

세상이 변했다. 사람들은 더는 콘서트홀에 가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음원이 공연의 복제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공연이 음원의 재현으로 취급받으며 현장음악이 가졌던 생동성은 이제 한 명의 아티스트를 영상, 글, 이미지 등의 다각적 통로로 접하는 입체성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수용방식도 변화를 맞이했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음고의 조합과 배치, 그리고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기능적 관계의 섬세함에 관심이 없다. 물론 그것을 감지하고 어떤 판단을 세우는 것 자체가 민감한 청각신경을 요구하는 일이기는 하나 중요한 건 그런 감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총합보다도 더 많은 수가 기본적으로 그런 요소들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요소들을 파악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어떤 열등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리듬, 음향, 질감, 분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옮겨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클래식 역시 이제는 질감, 분위기로 소비된다. 사람들은 팝 음악에서 들을 수 없는 오케스트라 소리, 깨끗한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클래식을 듣는다. '아날로그 한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소리의 질감에 소박한 선율들이 결합한 음악' 이것이 현대에 클래식이 이해되는 양상이다. 동양권에서 클래식이 소비될 때 낭만 시대의 음악이 유독 인기를 끄는 것은 이와같은 흐름의 반영이다. 

클래식과 비슷한 질감, 분위기를 가진 음악을 하나 더 꼽으라면 단연 영화음악이다. 이는 영화음악이 역사적으로 클래식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음악은 영상의 정서적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라는 그 본질적 속성탓에 제 문법과 필요에 맞는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영화라는 매체의 대중성 덕분일까. 영화음악의 발달사를 보면 그것이 클래식의 음향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미감을 무서운 속도로 쫓아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클래식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특정한 리듬적, 음향적, 질감적, 분위기적 측면이 극대화된 지금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 음악들 중 오케스트라를 이용한 것들을 한번 들어보라. 목관악기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현악기가 주를 이끌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금관이 소리를 보강해주는 그 전형적 형태는 사람들이 클래식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절절한 애수, 그리고 웅장함임을 말해준다.

재밌는 현상은 그처럼 변화한 영화음악의 미학에 역으로 클래식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당연히 상업영화의 메카 할리우드가 있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졌다. 그 흐름의 선두에 필립 글래스가 있었다면, 요즈음 주목받는 작곡가 중의 한 명으로는 올라 야일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합창에) 스트링 콰르텟을 더블링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크고 빽빽한 소리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각 분야의 합보다도 큰 효과를 만들어낸다 ... 그 점이 나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크고, 교향악적이고, 빽빽한 질감을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 작곡가들이 그와 같은 회화적이고 빽빽한 질감을 사용하는 작곡가들이 대부분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 올라 야일로(Julie Amacher, ClassicalMPR, 2016)

올라 야일로(Ola Gjeilo)는 1978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현재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리랜서 합창 음악 작곡가다. 전업으로 일하는 것이 가능한 합창 작곡가는 일반적으로 2가지 경우 중 하나에 속하는데, 첫 번째는 합창 음악에 대한 지역적 기반과 수요가 탄탄해 지휘자 등을 겸하여 지역음악가로 사는게 가능한 경우이고 두 번째는 나라 자체가 워낙 거대한 음악 시장을 보유하고 있어 그중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 클래식, 그리고 그 안에서도 더 작은 합창 음악 수요만으로도 전업 작곡가로 사는게 가능한 경우다. 올라 야일로는 명백히 후자이며 그가 발 디디고 있는 토양은 그가 현재 거주 중인 미국의 음악계다. 

그의 합창 음악은 중세적 분위기를 풍기는 소재와 영화음악 같은 선율, 음향으로 특징된다. 이런 그의 이같은 개성은 그가 자주 언급하듯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영국문화에 대한 선망의 발현이기도 한데, 중세 및 영국 민요의 선율을 이용해 독특한 색채의 음악을 만드는 게 랄프 보건 윌리엄스 등 영국의 근대 클래식 작곡가들의 중요한 경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들 영국 보수계열의 작곡가들은 현대에도 '영화음악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되고 또 실제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사실, 올라 야일로의 음악이 중세적 정서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그의 음악은 중세음악과는 거리가 멀다. 간혹 중세선법을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중세음악의 그 어떤 기법적, 선율적 특징도 내재되어 있지 않으며 중세선율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중세적 분위기는 사실 실제 중세의 분위기라기보단 20세기 이후 미디어 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중세 판타지'의 분위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그런 중세 판타지를 소재로 하는 게임이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른바 '에픽 음악(epic music)'의 느낌과 선율스타일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중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중세가 아니라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의 중세인 것이다.

 

 

모든 작곡가는 자신의 지역적, 문화적 기반을 가지기 마련이다. 지극히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작곡가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 시리즈에서 앞서 소개했던 파스칼 뒤사팽이나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에게 그것은 프랑스 아카데미즘 및 멜랑콜리였고 마그누스 린드베리와 에릭 에센발드에게 그것은 북유럽의 자연에서 우러나온 어떤 장대함이었다. 그런데 올라 야일로 음악의 미학적 표지가 되어주는 중세적 정취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 의미의 지역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외려 그것은 앞서 밝힌것처럼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중세 판타지의 미감이다. 그가 거처하는 예술적 토양은 사람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미디어 가상의 세계인 것이다. 이 미디어 가상의 세계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당연히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디즈니랜드의 고향인 미국. 올라 야일로는 그래서 실로 미국적인 작곡가이고, 그래서 어쩌면 가장 현대적인 작곡가일 것이다.

이는 그의 개인사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르웨이 태생이지만 자기 유년기의 정신적 고향은 영국에, 전반적인 문화적 토대는 미국에 있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곤 한다. 그가 대학생 신분으로 해당 국가에 유학을 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그 나라에 거주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이때 그가 말하는 영국, 미국은 틀림없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영국과 미국일 것이다. 토머스 탤리스, 빅 벤, 템스 강, 다우닝가 등으로 대표되는 TV 속 영국과 브리트니 스피어스, 애플, 도널드 트럼프가 있는 인터넷 속 미국말이다. 

나는 그것(노르웨이)이 (내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을 좋아하고, 그곳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나라지만, 나는 나의 음악취항과 스타일이 미국과 영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 올라 야일로

성장하며, 나는 영국문화에 큰 관심을 둬왔다. 그리고 언젠간 내가 그 사회에 속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영국에 가고 싶었다.

- 올라 야일로(Ray Holstein, An Exclusive Interview With Ola Gjeilo, 2015)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사물의 실체보다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시물라크르'라 칭했다. 그리고 현대, 특히 미국의 현대를 시물라크르의 시대라 말했다. 숨 쉬고 걸어 다니는 마릴린 먼로보다 TV를 통해 전국으로 송출되는 마릴린 먼로가 더 분명하게 느껴지는 시대, 이 시대에 우리의 세계관념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SNS는 실제의 광장만큼이나 현실적인 공론의 장이고 해리포터 속 세계관의 명암은 우리가 사는 옆 동네만큼이나 뚜렷하다.

자연적 세계에 그에 대한 관념, 곧 시물라크르까지 더해지며 우리의 세계는 극도로 복잡해졌다. 현대인이 고전주의 시대의 풍류가와 같이 극도의 지적긴장을 필요로 하는 예술을 즐기지 못하는건 그들보다 시간이 없어졌고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그 복잡한 삶 속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가볍게 풀어주는 마사지와 같은 예술, 빠르고 직관적으로 지각되는, 그리하여 값없이 자극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사탕 같은 예술이다. 올라 야일로가 자신이 '우울감이나 현학성을 멀리하고' '대중과 가까이'하는 '정직'한 음악을 추구한다 말할 때 이 '정직'은 예술적 의도를 조금도 교묘히 숨기지 않음으로써 모든 요소가 즉자적 감각의 대상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 음악에서 정직함을 느끼기를 바란다. 나는 기교적이거나 우울한 음악이 아니라 고양되고 뜻깊은 음악을 만들고 싶다.

- 올라 야일로(Julie Amacher, ClassicalMPR, 2016)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대중적인(populist)' 작곡가라 생각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언제나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내 음악이 전달되기를 바랐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기를 바랐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많은 클래식 음악들이 그와 같은 목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올라 야일로

(Ray Holstein, An Exclusive Interview With Ola Gjeilo, 2015)

보드리야르는 시물라크르화된 세계를 비판했다. 시물라크르는 그 근본이 허황된 가상,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사회에서 자본의 노예로 소진되는 현대인들을 마사지해줄 뿐인 예술은 허위와 위선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철학은 미디어 비판, 나아가 자본주의비판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경고처럼 시물라크르의 미디어 세계는 그저 허황된 가짜일까? 그리하여 그것이 세계와 나 사이에 1차원적 촉감의 단절을 가져올까? 

올라 야일로와 비슷한 성향의 작곡가중 한 명인 에릭 휘테커는 'Virtual Choir'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것은 인터넷 스트리밍을 이용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화면을 통해 합창단의 단원으로 참여하고 작곡가인 휘테커가 직접 그것을 지휘하여 하나의 네트워크 콘서트홀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사라진 듯 보였던 음악의 생동성, 현장성이 외려 그 미디어 기술을 통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올라 야일로 역시 비슷한 프로젝트를 했다. 북구의 자연을 소재로 한 그의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이 떠올린 북구의 자연풍광을 인스타그램에 태그로 올리면 그것들을 모아 음악비디오를 만드는 것이었다. 휘테커의 프로젝트가 공연성의 복원이었다면 올라 야일로의 것은 SNS를 이용한 정서 공동체의 수립이었다. 휘테커가 미디어를 통해 단절된 사람들의 몸을 다시 연결했다면 야일로는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했다.

그 피드에 올라와 있는 사진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툰드라 비디오로 만든다. 사람들이 인스타그램 태그를 통해 올린 사진들을 이용해 하나의 멋진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 올라 야일로(Julie Amacher, ClassicalMPR, 2016)

야일로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하든,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그의 음악이 성공했고, 선굵은 의미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흥연주가 좋아서 악보를 멀리한다는 이 사람, 자기는 영화음악같은 음악을 만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이 사람은 클래식 진영의 시선으로 보기엔 무척 저돌적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음악계 전체의 흐름에서보면 그다지 저돌적인것도 아니다. 그는 세간에선 여전히 보수적인 음악가로 여겨진다. 수많은 현대의 전위적(그래서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클래식 작곡가들이 아예 그런 판단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을때 말이다.

바야흐로 클래식의 황혼이다. 클래식의 쇠락은 전통적으로 그 지식 보존과 계승의 수단이었던 악보의 쇠락과 함께 찾아왔다. 이제 음악은 음원을 통해, 유튜브 영상을 통해, 영상의 배경을 통해 보존되고 계승될 수 있다. 어쩌면 클래식이 살아남는 방법은 배를 갈아타는 것인지 모른다. 탑에서 들판으로, 지면에서 화면으로.

나는 워낙 고집이 셌다. 대학에서도, 나는 교수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거의 하지 않은 것 같다. 만일 당신의 마음이 당신을 어딘가로 이끈다면 그 직감을 따라야만 한다. 그 누가 뭐라 하든 간에 말이다!

- 올라 야일로(Kathy Parsons, 2010)

 

[각주]

1. http://olagjeilo.com/about/long-bio/

2. https://www.classicalmpr.org/story/2016/06/29/new-classical-tracks-ola-gjeilo

3.https://blog.sheetmusicplus.com/2018/06/04/composer-spotlight-interview-with-ola-gjeilo/

4. http://www.musicroom.com/blog/an-exclusive-interview-with-ola-gjeilo-19828

5. https://mainlypiano.com/interviews/ola-gjeilo-2010-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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