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문화재단, 정율성음악축제 개최해…TIMF앙상블 초청

정율성과 윤이상 두 명의 영?호남 대표 음악가들의
작품을 통해 지역을 넘어 음악으로 가치관을 공유해

이상준 기자 승인 2019.09.04 13:16 | 최종 수정 2019.09.04 14:05 의견 0
▲<정율성음악축제 – TIMF앙상블 초청연주회> 포스터

오는 9월 6일(금) 오후 7시 30분 광주 유스퀘어 문화관 금호아트홀에서는 아시아 작곡가들이 창작한 음악의 가치를 조명하는 <2019 정율성음악축제> 'TIMF앙상블 초청 연주회'가 개최된다고 광주문화재단이 밝혔다.

<2019 정율성음악축제>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이번 연주회는 정율성과 윤이상, 두 명의 영?호남 대표 음악가들의 작품을 통해 지역을 넘어 음악으로 가치관을 공유하고, 또한 현시대 가장 활발하고 실험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아시아 창작 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번 연주회에서 연주되는 프로그램은 정율성과 윤이상뿐 아니라 국내외 저명한 작곡가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광주문화재단에서 위촉한 작품인 박정양의 '정율성의 가곡 '신산가'에 의한 주제와 변주곡(2019)'과 위촉 편곡작품인 성용원의 '연안송(1938/2019)'이 초연된다. 또 중국 렌다민의 '환상곡 8중주 by 정율성(2006)', 윤이상의 'Garak(1963)', 'Together(1989)', 배동진의 'Reflective(2014)', 최지연의 'JEUX DE CUBE (2007)' 등이 연주된다.

▲TIMF앙상블 연주 실황 영상

연주는 통영국제음악제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전문연주단체이자 세계 유수의 축제에서 아시아 작품의 음악성과 한국 예술인들의 우수한 연주력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아시아 대표 현대음악단체 'TIMF앙상블(지휘 백윤학)'이 맡았다.

한편, 광주광역시가 주최하고 광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정율성음악축제는 중국의 3대 혁명 음악가로 칭송받는 광주 출신 정율성 선생의 음악과 예술혼을 널리 알리고, 아시아를 아우르는 국제적인 문화 콘텐츠 발굴을 위해 2005년부터 지금까지 추진해 오고 있다.

이번 공연은 전석 무료이며, 문화N티켓(https://www.culture.go.kr/ticket) 사전 예약 후 관람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정율성음악축제 홈페이지(http://vmcg.or.kr)를 통해 알 수 있다.

 

작곡가 정율성은 누구일까?

작곡가 정율성

작곡가 정율성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중국에서 활동한 작곡가로 중국 최고의 조선인 음악가이자, 중국 공산당의 100대 건국공신 중 하나이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으로, 광주 출신이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1929년)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난징으로 건너갔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중국에 머물면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이때 의열단장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장이던 김원봉이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36년 그는 첫 작품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옌안에 도착했다.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작곡 활동과 함께, 1941년 7월부터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를 비롯해 이듬해(1942년) 12월부터 타이항산의 화북 조선 혁명 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44년 4월 다시 옌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황해도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수락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 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됐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동년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전선 위문 활동을 전개했다. 1951년 4월 저우언라이의 요청으로 다시 중국으로 갔으며, 1956년 북한에서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을 보고 중국 국적을 얻어 정착했다. 이후 중국에서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홍위병들의 수많은 협박과 함께 친구들에게서 받은 원고가 모두 수색당해 많은 악보 등이 유실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 대혁명이 끝난 지 1976년에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돌연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

사후 1988년, 덩샤오핑의 명령으로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정식 지정되면서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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