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숨소리조차 통제하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숨소리조차 통제하는 노년의 호로비츠

이준호 객원 기자 승인 2018.12.15 16:28 | 최종 수정 2018.12.17 04:15 의견 3
Vladimir Horowitz

시계를 좀 과거로 돌려보자. 전설의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생애 마지막 모스크바 공연.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인 호로비츠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였다. 아직도 유투브를 조회 수 순으로 검색하면 늘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 영상,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으로도 그 순간의 압도적인 감동은 시퍼렇게 살아서 나온다. 하물며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야 어땠겠는가.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해 나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앞둔 이 노인은 듣는 이의 숨소리와 맥박마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해버린다. 이건 대체 누구의 공인가? 작곡한 슈만의 공로인가, 기가 막히게 연주한 호로비츠의 공인가?

어쩌면 공과를 배분해 따지는 행위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슈만과 호로비츠는 시공을 넘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음악이란 도구로 지구상에 새겨놓은 사람들이기에. 다만 유추는 가능하다. 슈만이 이야기하고자 한 바와 호로비츠가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기가 딱 그 순간에 절묘한 접점을 찾아냈겠다는 것 말이다. 그 당시 호로비츠의 마음은 물어보지 않은 이상 모른다. 하지만 슈만의 마음은 알 수 있다. 이 짤막한 곡에 들어있는 수수께끼 같지만 신비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이야기만 있다면 호로비츠의 데자뷔는 누구든 가능하다.

“트로이메라이의 진짜 뜻”

'트로이메라이'는 독일어로 꿈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그냥 자다가 꾸는, 속된 말로 '개꿈'의 의미가 아니다. 그걸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온 음악은 성격이 다를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돌 댄스곡 같은 음악 말이다. 그런데 슈만이 이야기하는 꿈이란, 뭔가 간절히 이뤄지길 바라는데 아직 이뤄지지 않았거나 일시적으로 좌절되었거나 하는 어떤 뭔가에 더 가깝다. 우연히 그 부분을 누군가가 어루만져 주었을 때 나사 풀린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눈물, 그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을 한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비가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 연주자에게는 권장할 해석은 아닐 것 같다.)

그렇기에 트로이메라이는 편하게 듣기엔 짠하다. 그리고 때로는 아려오는 가슴을 움켜잡는 상황도 발생한다. 특히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이 이뤄짐이 늦어진다거나 좌절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도 그랬다. 나는 뒤늦게 피아노를 전공으로 택한 사람이다. 그 결단이 있기까지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대학원에 음대생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몇몇 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이 '트로이메라이'가 들어 있는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전곡을 치고 있었다. '트로이메라이'가 나오는 순간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이 호로비츠와 대등한 수준으로 잘 쳐서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무기한 연기되어야 했던 자신의 꿈을 이룬 그 과정에서의 수많은 갈등과 노력, 좌절감과 성취감의 교차가 그 짧은 곡 안에 모두 녹아 있었다. 객관적인 연주력이야 호로비츠에 비할 수가 없겠지만, 그 사람의 연주에는 인생이 녹아 있었다. 당장 10초 뒤에라도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만 같은 그느낌,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연주 정말 좋았다”며 인사를 건넸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으면 가장 감동적인 음악

그렇게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담은 이야기는 호로비츠가 아닌 한 지방대 음대생의 스토리를 타고 와서 다시 한번 내호흡과 맥박을 통제했다.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도 하지만, 그 기다림의 고통이란 얼마나 큰가. 그 이야기가 담기기만 한다면 이 짤막한 소품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음악이 된다. 그래서 쉬워 보여도 결코 쉽게 칠 수가 없는 곡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틈날 때마다 혼자 쳐보고 싶어지는 곡이기도 하다. 호로비츠에게 받은 감동을 거쳐 한 지방대 음대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담아냈던 그 간절한 어떤 갈망이 지금은 또다시 나의 이야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주어와 동사, 목적어만 바뀌었을 뿐. 내가 연주하는 슈만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사람을 나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한다. 그리될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

 

저작권자 ⓒ 클래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