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통해 고찰하는 예민한 나, 예민한 사람
이준호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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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0 17:36 | 최종 수정 2018.12.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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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나도 두손두발 다 든 쇼팽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감정이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냥 생각도 안 하고 넘어갈 것들을 몇날 며칠씩 가슴에 넣어두고 끙끙 앓거나 괜히 버럭대기도 한다. 사회생활에 크게 좋을 것 없는 성격이다. 물론 음악을 연주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만 말이다. 적지 않은 빈도로 들을 수 있는 연주자들의 까탈스러운 면모를 접할 때면 눈살이 찌푸려지기는커녕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음악 하는 사람이니 오죽하겠냐”는 동지의식이 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민한 나도 쇼팽을 칠 때면 무척 힘들어한다. 원인은 또한 쇼팽 특유의 예민함 때문이다. 쇼팽 음악의 예민함은 정말 차원이 다르다. 쇼팽을 칠 때는 공부하는 내내 지독스런 모순과 싸워야 한다. 이 모순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박자와 음악성의 싸움이다. 음악적인 상식으로 따지자면 박자는 기본으로 깔고, 그 위에 감성과 아이디어가 얹혀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쇼팽은 치다 보면 박자를 정확히 맞춰놓으면 음악이 좀처럼 살지 않고, 음악을 좀 살려서 치다 보면 박자가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얼추 들을만한 수준으로라도 맞추는 것만 해도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수필 “방망이 깎는 노인”급의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이런 쇼팽의 예민함에 기가 질리다 보니 한동안은 쇼팽을 한 페이지도 치기 싫었다.
쇼팽의 예민함을 통해 나를 돌아보다
그런데 문득 일상 중에 나에게도 이렇게 까탈스러우리만큼 예민한 면이 있다는 걸 스스로 일깨워주는 일들이 자주 일어남을 자각했다. 그걸 일깨워주는 매개체는 놀랍게도 쇼팽의 음악이다! 쇼팽은 그토록 예민했기에 그것을 무기로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지만, 쇼팽이 일상중에는 마냥 좋은 사람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감성덩어리 사나이를 누가 거둘 수 있었으랴. 마침 쇼팽 녹턴 2번을 레슨하기 위해 악보를 펴 보았다. 피아노로 가는 첫 프레이징의 막판에 흐름과 전혀 상관없는 포르테가 뜬금없이 등장한다. 언뜻 보면 인쇄오류로까지 보이지만, 이것이 어쩌면 쇼팽표 예민함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레슨을 받는 사람은 곧이곧대로 그 포르테를 뜬금없이 크게 쳤다. 나는 바로 코멘트를 해 주었다. “곧이곧대로 크게 치지 말고, 길거리를 걷다가 이상형인 남자와 눈 마주친 그 느낌을 줘라”. 이 코멘트를 날리는 순간, 스스로 깨달았다. 이 흐름에도 맞지 않는 포르테에 쇼팽 특유의 예민함이 압축적으로 녹아있음을. 그리고 나를 되돌아본다. 치면서 그토록 성가셨던 그 지독스럽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는 예민함이, 상당부분 내 모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때로는 나도 내 자신의 예민함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가 있다. 내가 힘든데 날 만나는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랴. 그 예민함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세상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날 만나는 사람들이 날 겪어 보고 내가 쇼팽을 칠 때 느끼던 그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다. 물론 음악적으로 따지자면 쇼팽의 본질을 깨달은 셈이니 쇼팽 음악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되었겠지만, 일상 중에 만나는 사람에게는 아니다.
이왕 예민하게 태어났다면, 따뜻해지길 선택한다
쇼팽과 씨름을 하다보니, 정말 많은 성찰행위가 자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좀 혹독하다 싶은 자기비판도 뒤따라온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는 언제나 바람직하다. 쇼팽이 그걸 도와준 셈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쇼팽을 들어 보니, 쇼팽 특유의 예민함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음악을 빚어내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럴 때면 예민하기로는 쇼팽과 비등비등하지만 확실히 더 따뜻한 슈만으로 간다. 마침 계절도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겨울이다. 어차피 조물주가 예민하게 만든 나란 인간, 따뜻함으로 승화시켜 보리라 맘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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